* 2990자. 짧은 글.





"내가 질리지 않아요?"


매일 밤 주고받던 속삭이듯 자그마한 전화에서, 갑작스럽게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질리지 않아요? 마치 내일 일정을 묻듯 평온한 목소리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는 조금 괴리가 있었다. 무슨 뜻일까?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는 항상 갑작스럽지 않은 고민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그 안의 고민을 읽어내 본다. 전화기 너머 작게 들려오는 바람 같은 너의 숨소리가 조금 떨린다. 아. 긴장하고 있구나. 작게 웃는다. 그는 지금 내 대답보다 이 침묵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다면 얼른 안심시켜줘야지. 침묵을 깬다. 무슨 뜻이야? 고민 없이 그저 머릿속의 의문을 솔직하게 입 밖으로 뱉으면서.


"그냥. 조금 걱정이 돼서요."

"어떤 게?"

"질릴까 봐요. 나한테."

"누가? 내가 너한테? 하하. 설마."


오히려 걱정된다니 다행이야. 난 네가 나한테 질린 걸 돌려 말하는 줄 알고 쫄았지 뭐야. 장난스럽게, 농담하듯 가볍게 말하자 금방 "그럴 리 없잖아요!"하고 토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그래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해줘서 기쁘다. 그렇게 속삭임으로 대답한다. 그러면 다시 찾아오는 침묵. 전화기 너머의 공기가 떨린다. 조금 전 불안을 담고 있는 떨림과는 다르다. 작게 웃었다. 이번엔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내지 않고.


"왜 그런 걱정을 해."

"그야. 우리 좀 힘들고. 내가 당신... 힘들게 하니까. 답답하기도 하고요."

"답답하지 않은데. 힘들지도 않고."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거짓말이야. 난 당신이 그런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것도 싫어요."



입가에서 웃음을 지운다. 오늘은 그에게 진지하게 대답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난 너한테 거짓말 안 해. 이번엔 아무 대답이 없다. 난 널 정말 좋아해, 케이. 이번엔 작은 대답이 돌아온다. 저도요. 기쁘다고 대답을 돌려준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 우리는 작게 다투었다. 그 전에도. 그리고 그 전에도. 금방 미안하다고 사과할 정도로 아주 작고 일상적인 다툼. 그러나 점점 그 빈도가 잦아지고 있었다. 감정을 습관적으로 숨기는 그와 감정을 습관적으로 꾸며내는 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로지 목소리와 텍스트만으로 서로의 속마음을 드러내다 보면 작은 오해가 생기곤 했다.

최근 우리의 입에선 '좋아해'보다 '미안해'가 더 자주 오갔다. 연인이 된 지 벌써 2년. 고등학생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발버둥 치는 그도, 가까스로 성인의 흐름에 몸을 가누게 된 나도 너무 예민했다. 예민함. 그 속의 익숙함. 우리는 겨울의 칼바람을 피해 몸을 움츠리고 옷 속으로 파고드는 사람처럼 서로에 대한 말을 아꼈다. 아주 작은 말이 혹시라도 예민한 서로를 찌를까 봐.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란 익숙함 때문에.


몸을 움츠려 바람을 피하다 보면 몸은 더 뻣뻣하게 굳어 떨려오는 법이다. 아. 우리는 겨울에 접어드는 중이구나. 문득 깨닫는다. 연인으로서 겨울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발돋움. 몸을 에는 칼바람에 문득 지난 계절을 뒤돌아보게 된다. 아. 그땐 따뜻했는데. 그땐 뜨거웠는데. 하고.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된 겨울에 불안함으로 남는다.



"츳키."

"…."

"대답해주라. 케이-"

"응."

"많이 힘들어?"

"아뇨."

"솔직하게 말해줘. 오해하지 않을 테니까."

"... 조금."



조금의 망설임 끝에 작게 나온 그의 대답이 준 여운을 곱씹는다. 전화기 너머의 너는 아마 조금 긴장한 채로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테다. 온 신경을 나의 숨소리와 목소리에 집중한 나머지 전화기 너머의 너의 숨소리는 조금 거칠어진다. 사실 나는 이 순간을 즐기는 편이다. 짓궂게도 말이지.


"케이."

"네."

"네가 힘들면, 놓아줄게. 내가 잡고 있는 게 널 힘들게 한다면 말이야."

"그게 아니…."

"내 얘기 들어줘야지, 케이."


아. 이런. 울릴 것 같은데. 그건 싫다. 그냥, 바람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길 바랄 뿐.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면 몸으로 파고드는 냉기에 온몸이 시리다. 그런 거다. 겨울에 접어든 연인. 우리의 모습.


"그치만."

가만히 운을 뗀다. 꼴깍하고 긴장한 나머지 목울대를 울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네가 날 포기하지만 않으면. 나도 놓지 않을 거야."

"..."

"나 놓지 않을 거잖아."

"..."

"그렇지?"

"뻔뻔한 사람."

  


너의 목소리는 한참 추운 곳에 서 있다 입이 얼어버린 사람처럼 떨렸다. 울지마. 속상하잖아. 달래듯 속삭이면


"안 우는데요."

 

토라진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리고 조금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아마 더 싸울 일이 많아질 거라고. 겨울은 이제 시작이니까. 날이 갈수록 더 힘들어질 거다. 우린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언젠가 함께 지낼 날을 막연하게 꿈꾸며 견디고 있는 중이니까. 그 사실이 못내 외롭고 아쉽고 쓸쓸하게 다가오는 날이 많을 것이다. 자꾸만 몸을 움츠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곁에 있고 싶어. 좋아하니까."

"저두요."

 


난 저도요-하는 말밖에 못 하네요.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려온다. 

 

"괜찮아. 뭐라고 말하는 게 제일 좋을까, 많이 고민하고 있다는 거 아니까."

 

 

그거면 충분해. 그러다 아무리 고민해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줘. 그럼 내가 알아들을 테니까. 오늘처럼.

 

어느새 서로의 숨소리에 잔잔한 온기가 돌았다.

 

겨울에도 온기는 있는 법이다. 거리를 밝히는 작은 전구의 온기처럼. 여름의 햇살에 비하면 보잘것없더라도, 그 덕에 이겨낼 수 있는 거다. 겨울의 밤을. 

 

"곧 만나러 갈게. 보고 싶다."

"응. 이번엔 무리해서라도 와요. 나도 보고 싶으니까."

"하하. 알겠어. 대신 꽉 안아줘야 해."

"당연하죠.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길어진 통화에 핸드폰이 뜨겁다. 그래도 놓고 싶지 않았다. 아마 새벽 바람에 평소보다 솔직해진 덕에, 우리의 수줍음이 옮았기 때문일 테니까. 

 

잘 자라는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아무도 통화를 종료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대로 서로의 숨소리를 듣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작은 기척.

둘의 숨소리가 느릿느릿, 고른 소리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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