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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로] 뭐 하나 특별하지 않은

2017년 11월 17일 쿠로오 생일 합작 투고





* 2017 쿠로오 생일 합작 투고

* 합작 링크: http://kkongchiday.creatorlink.net/

* 약 11,400자







"쿠로오. 이런 말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겠지만..."

"뭐야."

"생일 축하한다."

"아아... 진짜냐... 12시 지났어?"

"응. 3초 전에. 얼마나 남았어?"

"절반... 조금 덜 남았나."

"아까도 반 정도 했다고 하지 않았냐?"

"그러니까 그것보단 덜 남았다고 했잖아. 이거 계속 앉아 있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그럼 오늘 밤샘 확정이네."

"그렇지..."


한숨을 깊게 들이쉰 쿠로오는 그대로 노트북 앞에 엎어져 버렸다. 며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매달려도 끝날 생각을 안하던 과제는 드디어 제출기일을 맞이했다. 과제는 아직 제출할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이 수업만 듣는 게 아니니까 진정 좀 하시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는지. 그러나 마음속으로만 외친 소리는 당연하게도 교수의 귀에 닿을 리 없어서, 끝도 없이 이어진 과제의 산은 결국 오늘을 맞이했다. 오늘. 그러니까 쿠로오의 생일이다. 


"커피 한 잔 타줄까?"

"나 벌써 3잔째야."

"아. 그럼 무리. 물이나 마셔라. 위 탈 나겠다, 진짜로."

"넌 안 자냐? 나 신경 안 써도 되니까 불 끄고 자."

"됐어. 나도 할 일 있고."

"할 일이 있다기엔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멀뚱멀뚱 있지 않냐?"

"아, 아직 여유 있어서 그래!"

"그럼 자!"

"내 집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쿠로오는 보쿠토의 '내 집이니까'에 더이상의 지적을 멈추기로 했다. 밤샘 과제가 확정된 순간 단지 제집보다 학교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보쿠토의 집에 들이닥쳐 노트북만 두들기고 있기를 반나절.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군말 없이 작은 테이블을 내주곤 간식과 음료까지 챙겨주는 그에게 일찍 자라 마라 핀잔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관심도 없고. 지금 급한 건 보쿠토의 줄어드는 수면시간보다 당장 내일 오전 수업에 제출과 발표까지 끝내야 하는 이 망할 과제니까. 


쿠로오가 보쿠토의 자취방을 제집 드나들듯 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굳이 도쿄에 있는 본가를 두고 통학은 죽어도 싫다며 자취를 시작한 보쿠토의 이사를 도울 때부터 자취방의 비밀번호는 쿠로오와 공유하게 되었다. 공유라고 할 것도 없지. 애초에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재설정한 것은 쿠로오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같은 대학의 다른 학과에 진학한 둘은 여전한 친분을 과시하며 붙어 다니기 일쑤였고, 학교 정문의 가까운 곳, 그러면서도 어떻게 찾았는지 꽤 조용한 곳에 위치한 적당히 넓고 적당히 깔끔한 보쿠토의 자취방은 자연스럽게 쿠로오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과제로 인해 밤샘을 해야 하거나 (쿠로오의 학과는 유독 과제가 많았다.) 모임에 다녀와 술에 떡이 된 날이면 쿠로오는 제집 드나들듯 자연스럽게 보쿠토의 집으로 향했다. 보쿠토 역시 그것에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침 야식이 고팠는데 잘 됐다느니 너스레를 떨며 쿠로오를 반기는 내색이었다. 하긴. 혼자 있는 것보단 여럿과 왁자지껄 떠드는 것이 더 어울리는 녀석이니, 자취가 적적할 만도 하지. 쿠로오는 그냥 그 정도로 받아들이며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보쿠토의 자취방은 쿠로오, 가끔은 한참 입시 준비로 바쁜 주제에 도망쳐 나왔다며 뻔뻔한 얼굴로 앉아있는 아카아시도 함께하며 늘 복작였다. 


"그러고 보니까."

"엉?"

"너 안 불편하냐? 나 연락도 없이 막 쳐들어오는데. 오늘도 그렇고. 뭐 이제 와서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갈 거긴 한데."

"갑자기 왜 이래? 과제 하기 싫어?"

"과제야 처음부터 하기 싫었고...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으음... 뭐 별로. 너 올 때마다 슬쩍슬쩍 집 좀 치워주고 나가잖아. 좋은데, 나는."

"흐음. 그럼 됐고."

"AV도 공유하는 사이에 뭐 새삼 그런 걸 따져."

"하긴. 아, 그러고 보니 저번 건 별로더라. 하여간 취향 이상해, 진짜."

"내가 뭐 어때서!"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이어진 시답잖은 대화로 다시 떠들썩해졌다. 그러기를 한 10분 정도. 다시 푹 꺼진 눈으로 자판을 두들기는 쿠로오 덕분에 방은 쿠로오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와 이따금 보쿠토가 움직이며 내는 덜그럭 소리, 냉장고나 다른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딱히 대화가 없다고 어색할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엉이가 영 심심해 보이는 것이...


"야."

"엉."

"자라, 그냥."

"할 일 있다니까?"

"안 하고 있잖아."

"하고 있어! 신경 쓰지 말라고."

"안 하고 있잖아 전혀. 뭔 고집을 부리고 그러냐. 불 꺼도 상관없고 노트북 밝기도 줄여줄 테니까."

"신경 안 써 그런 거. 방해 안할테니까아..."

"방해된다는 건 아니고. 괜히 나 때문에 못 자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미안하다. 밤새우고 오전수업 가려면 집에서 출발하는 거 버거울 것 같아서."

"...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건 상관없어."


보쿠토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뭐야. 왜 저래. 일단 신경 쓰지 말라고 했으니 이쪽엔 신경 끄고 과제에 좀 더 집중해본다. 이러나저러나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과제를 얼른 끝내고 잠깐이라도 자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곧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이따금 쿠로오가 머그컵에 든 차를 마시고 테이블에 내려놓는 달그락 소리만이 자취방에 울려퍼졌다. 머그컵엔 아직 온기가 돌았다. 쿠로오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보쿠토가 새로 우려낸 차로 바꾸어놓은 모양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노트북 너머를 흘끔 바라보니 어느새 그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었다. 침대 가서 제대로 자라니까... 하지만 저 큰놈을 혼자서 침대로 옮길 재간이 없으니 (솔직히 말하면 귀찮은 것이 더 컸다.)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와 녀석의 등에 덮어주었다. 다시 그 맞은편으로 와 앉아서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잘도 자네. 잠들어있는 보쿠토는 유독 얌전하고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어쩐지 낯설다. 얄밉게. 코라도 막아 놀려줄까 생각했지만, 도로 깨면 더 귀찮아질 테니 그대로 두기로 한다. 쿠로오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판을 두드리는 쿠로오의 손가락이 점점 빨라진다. 시곗바늘은 점점 해가 뜰 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뻑뻑한 눈을 비빈다. 잠이야 뭐. 이 녀석이 대신 자주고 있으니. 괜히 자는 놈을 발로 툭 쳐본다. 으응...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입을 우물댄다. 바보 같아. 




* * *



"으응..."


시끄러운 알람이 귀를 때린다. 보쿠토는 목이며 허리가 뻐근하게 아려오는 통증에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자세가 영 불편하다. 짓눌린 볼에는 테이블의 차가운 냉기가 돌았다. 아아. 테이블에 엎드려서 그대로 잠들었나. 그래도 몸에는 온기가 돈다. 이불이 기분 좋게 몸을 누르는 감각. 이불은 언제 덮었지...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두고 있으려니, 잠에 취한 쿠로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우으... 저것 좀 꺼..."

"알았... 으어어어어어??"

"으으... 시끄럽다고오..."

"아니. 어어어어. 미안.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보쿠토는 얼굴에 바로 맞닿아오는 고른 호흡에 놀라 눈을 떴다. 거의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쿠로오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잠투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 얘는 왜 침대는 내버려 두고 사람 바로 옆에서 이러고 있냐. 


보쿠토는 코앞에 있는 쿠로오의 얼굴에 당황하다, 그가 눈을 떠 째려보기 시작하자 황급히 일어나 여태 울리고 있는 핸드폰의 알람을 껐다. 쿠로오는 그제야 부스스하게 일어나 눈을 꿈벅꿈벅 감았다 뜨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쟤는 왜 사람 코앞에서 자고있냐. 침대가 바로 옆에 있는데. 그런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쿠로오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선을 느낀 그가 보쿠토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데? 쿠로오의 눈이 그런 의문을 담은 채 불만스러운 모양새로 찌푸려진다. 뭐긴 뭐야. 왜 그러고 자고 있느냐고.


"너 어제 거기서 그러고 잠들었잖아. 테이블 위에서."

"어? 어어..."

"이불은 내가 덮어줬고."

"아아. 고마워."

"새벽쯤에 과제 끝나서 자려고 봤더니 이불은 그거 하나잖아. 꺼내긴 귀찮고."

"아. 하긴 이불 안 깔아뒀지."

"어차피 몇 시간 못 자니까. 그냥 낑겨 잔 거야. 요즘은 이불 안 덮으면 춥고."

"어어..."

"그냥 옆에서 잔 것 가지고 뭔 호들갑이야. 너 요즘 이상하다?"

"안 이상해!"


뭐, 그러던가. 왜 소리를 질러. 시끄럽게. 쿠로오는 잔뜩 투덜거리다 길게 하품을 하더니 그대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뭔 호들갑이냐니. 네가 너무 무신경한 거라고. 보쿠토는 잔뜩 토라진 얼굴로 이불을 털어 침대 위에 던졌다. 어쩐지 미묘하게 쿠로오의 체향이 벤 것 같다. ... 기분 탓이겠지. 


쿠로오는 간신히 밤샘을 면했을 뿐, 해가 뜨기 시작해 밖이 푸르스름해지고 나서야 겨우 눈을 붙인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두 배는 굼뜬 움직임으로 비척비척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이 영 불안해 보였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자라고 하고 싶지만, 오전 수업에 늦지 않게 가려면 지금부터 빠듯하게 준비해 나가야만 했다. 다행히 오늘 이 뒤로 다른 수업은 없다고 했으니. 그 뒤로 더 쉴 수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무리겠지? 저 꼴이니.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우리 어디 가기로 하지 않았냐."

"그랬지. 기억은 하네. 난 완전히 까먹은 줄."

"저번에도 가려다가 못 갔잖아. 그때도 내 과제였나... 어쩌지? 오늘 가?"

"됐어. 너 완전 죽상인데 그 꼴로 어딜 가냐. 가서 잠이나 자."

"가면 뭐 할 얘기 있다며."

"... 그것도 됐어. 신경 끄고 수업이나 가!"

"알았어. 거 되게 떽떽대네."


아침부터 서로 투덜대며 둘은 부산스럽게 나갈 준비를 했다. 나갈 준비래 봐야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노트북이며 필기구를 가방에 쑤셔 넣고 나가는 정도밖에 없었지만. 아아- 최악이다. 그래도 생일인데. 입으로 시종일관 투덜대는 쿠로오는 말과 달리 생일엔 썩 미련이 없다는 듯한 얼굴이다. 생일이거나 말거나. 그는 어쨌건 이 지긋지긋한 긴 과제를 드디어 청산하고 늘어지게 잘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이가 몇 갠데 여태 그런 거로 일희일비하겠어. 


그보단 보쿠토가 걸렸다. 생일엔 근사한 곳을 데려다주겠다느니, 생일 당사자보다 더 들떠 보였던 그는 과제가 여태 끝나지 않았다며 쿠로오가 들이닥쳤을 때부터 실망한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어차피 저녁 한 끼 먹고 오는 거면 밤새고 가도 괜찮다고 말해보았지만, 보쿠토는 피곤한 상태에서 데려가고 싶지는 않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다만 영 시무룩한 것이... 쿠로오보다도 본인이 더 가고 싶어 했던 모양이라 뒤끝이 영 찝찝했다. 뭐어, 수업 끝나고 한숨 자고 나면 저녁 먹으러 나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으려나? 


확신할 수는 없기에 쿠로오는 굳이 저녁 약속에 대해선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자식, 분명 오늘 수업 없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왜 따라나서는 건지. 뭐 따로 볼 일이 있는 모양이지만, 한 번 하나를 신경 썼더니 정말 온갖 것이 다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당장 직전에 파투가 났을 뿐, 원래 쿠로오와 생일 겸 선약이 있었으니 다른 일정은 없는 게 맞을 텐데. 아. 몰라. 알아서 하겠지. 애도 아니고. 


보쿠토와는 느릿느릿 걸어가다 캠퍼스 정문 앞에서 헤어졌다. 그는 끝까지 쿠로오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더니 뒤돌아 사라졌다.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저러고 있는 이유를 쿠로오는 아주 대강은 짐작했지만, 그냥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그치만. 귀찮으니까. 




* * *




마지막 남은 양심은 있으셨는지, 끝까지 과제로 괴롭히던 교수는 날도 좋고 큰 과제도 끝난 기념이라며 수업을 한 시간이나 일찍 끝냈다. 밤샘 여파와 싸워가며 3시간 연강을 들을 자신이 없던 차에 들린 반가운 소식에 모두가 환호했다. 모두가 지체없이 짐을 정리하고 빠른 속도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교수를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24시간도 되지 않아 사라지겠지만. 


자, 이제 어떻게 할까나. 쿠로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집으로 돌아가 푹 잠들어버리면 그만인 데다 쿠로오는 지금 당장 침대로 기어 들어가 자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보쿠토가 걸렸다. 아니 젠장. 내 생일인데 내가 이렇게 신경 써야 해?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다가도, 어쨌거나 뭔가 보답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집에 가서 자다가 도로 나오기는 귀찮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더 민폐 부린 다음, 보쿠토가 하자는 대로 해보지 뭐. 쿠로오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다시 보쿠토의 집으로 향했다. 





"뭐하다 이제 와?"

"쿠, 쿠로오?"

"뭘 그렇게 놀라. 온다고 메시지 보냈는데 못 봤어?"

"아, 아니, 그... 빈손이 없어서 확인을 못했는... 으어어어?"

"손에 든 건 뭐냐?"

"모, 몰라도 돼!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니, 감춰도 다 보이거든.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내용물이. 뭐야 그 케이크랑 꽃다발."


보쿠토는 손에 든 짐 때문에 한참을 낑낑거리며 들어오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놀라 허둥대다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놓쳤다. 빈손으로 뒤늦게 겉옷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세 통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약 한 시간쯤 전에. 「나 너네 집 간다.」 「한숨 자고 네가 가자고 한 곳인지 뭔지 가보자고.」 「뭐야, 집에 없냐?」 라는 내용의 메시지. 


"아니 나는. 피곤하다길래 당연히 집에 갈 줄 알았지."

"뭐어, 그럴까 하긴 했는데. 여기서 한숨 자다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너 어디 가고 싶다며. 할 얘기도 있고."

"아, 뭐야. 별거 아니었네."


어물쩍 질문을 회피하며 들어온다. 자꾸만 손에 든 꽃다발이며 케이크를 몸 뒤로 숨기며 엉거주춤 들어오는 꼴이 영...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 케이크는 유독 크기가 큰 데다 어쩐지 비싸 보이는 상자에 담겨있었고, 꽃다발도 크기는 작지만 강렬한 색을 내뿜는 것이 분명 특별한 날을 위해 따로 주문한 것들 같았다. 받은 건가? 받은 거면 왜 숨겨? 아니면 주려고? 누굴? 


뭐, 누구겠어. 이쯤 되니 어딜 가자고 하는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대강 짐작이 됐다. 그야, 쿠로오는 보쿠토에 대해선 모르는 게 거의 없었고, 보쿠토는 뭔가를 숨기고 몰래 하기엔 표정과 몸짓에서 고스란히 티가 나는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아는 척 하고 받아주기엔 영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보쿠토는 이미 잔뜩 시무룩해져 있는 상태고, 나는 너무 피곤했으니까.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본론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아무래도 타이밍이 엇갈린 모양이다. 


"그거, 내 거?"

"아니... 어... 응..."

"완전 화려하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보통 이런걸... 준비해야...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누가?"

"... 코노하..."

"푸핫! 받는 사람이 나라고는 말했어?"

"아니..."


이녀석은 아무래도 이번엔 망설이던 것을 끝장을 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았다. 쿠로오도 알고 있다. 보쿠토는 매년 무슨 날만 되면 어울리지도 않게 잔뜩 긴장해선 할 얘기가 있다며 뜸을 들였고, 쿠로오는 온갖 핑계를 대며 그것을 피해왔다. 재작년 생일에도, 재작년 크리스마스에도, 작년 생일에도,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화이트데이니 뭐니 하는 날에도. 그러니까 보쿠토는 재작년부터 그렇게 쿠로오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타이밍을 재고 또 재고 있던 거다. 다만 이렇게 티가 나서야. 쿠로오가 그의 마음을 눈치챈 것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전의 얘기다. 


저러고 집이라도 찾아오려고 했나? 준비된 것을 보아하니 아마 오늘 저녁 함께 가기로 한 식당에서 고백이라도 하려던 모양이었나보다. 으아. 이건 피하길 잘했네. 미안하지만 그런 화려한 것은 사절이다. 애초에 자꾸만 피한 것도 이런 낯간지러운 상황이 싫어서였는데. 쿠로오는 뒷머리를 북북 긁으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잔뜩 시뻘게진 얼굴은 분하다던가, 쪽팔린다던가, 망했다던가, 그런 온갖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자기 표정 완전 웃긴 거 알기는 할까? 쿠로오는 크게 하품을 했다. 어쨌든. 졸렸다. 


"내려놓고, 이리 와봐. 너도 어제 제대로 못 잤 을텐데, 일단 한숨 자고 나서 생각하자."

"뭐야, 그게! 나는 진지해!"

"나도 진지하게 졸려. 한계야. 너 말하는 중간에 잘지도 몰라."


까딱까딱 손을 흔든다. 보쿠토는 울상으로 케이크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꽃잎이 흐트러진 꽃다발을 테이블에 내려둔 채 쿠로오에게 다가왔다. 쿠로오는 그대로 보쿠토의 팔을 잡아끌어 제 옆에 눕힌다.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둘. 그러나 그사이에 섹슈얼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다니까. 워낙에 둘이 붙어 다닌 시간이 길다 보니, 뭘 해도 설렘이라던가 달콤함이라던가 하는, 연인에게서 느낄 법한 감정은 가슴속에 타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고. 이놈이 다른 놈이랑 붙어 다니느라 이렇게 놀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좀 섭섭하기도 하고. 영 애매한 이 감정에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아 쿠로오는 보쿠토의 고백을 피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잘 지내고 있는데. 쓸데없이 이러쿵저러쿵 둘 사이가 어떻다느니 정의내려 어색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사귀다 헤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냐. 죽이 잘 맞는 친구를 그런 식으로 잃기도 싫었다. 


"보쿠토."

"...응."

"난 꽃 안 좋아해."

"... 알아."

"단 것도 별로."

"그래서 별로 안 단 거로 사 왔어."

"그리고 너 저거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줬으면 발로 차이는 거로 안 끝나."

"으으..."


쿠로오는 몸을 돌려 잔뜩 죽상이 된 보쿠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쿠로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거 영... 삐진 애 달래주는 것도 아니고. 


"야. 어차피 네가 나 좋아하는 것도 알고. 내가 아는 거 너도 아는데 뭘 그렇게 생일에 이벤트까지 준비해가면서 구색맞추기를 하냐."

"네가 제일 못 됐어. 알면 모르는 척을 하던가 다 알면서 매번 이렇게 초를 치냐. 이게 몇번째야 대체..."

"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니 그런 거 상관없이 말하려면 그냥 하면 되잖아. 티라도 내질 말던가."

"그냥 말하면 어물쩍 넘어갈 거잖아. 그거 못하게 하려고 이런다."

"... 그럴 거란 건 아네."

"내가 널 한 두 번 보나."


네가 제일 나빠. 쿠로오는 그의 토라진 얼굴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이거 뭔가 상황 진짜 이상한데. 이렇게까지 진지해야 하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대강 알고 있었다곤 해도 직접적인 언급은 피해왔으니 이런 대화도, 분위기도 처음이다. 생각했던 것만큼 어색하고 낯간지럽지는 않았다. 그게 더 문제지. 대체 이게 뭐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쿠로오는 계속 가슴에 품어왔던 의문을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귄다고 가정을 해보자고."

"가정하는 건 또 뭐야. 그런 애매한 거 싫어."

"아니. 좀. 가만히 듣기나 해봐."


사귀는 거나 지금 이러고 있는 거나 다를 게 뭐냐? 팔을 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묻자 그제야 보쿠토가 시선을 맞춰왔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잠기 고민하다, "그러게."하고 맥빠지는 소리를 해댄다. 


"아니, 어차피 허구한 날 같이 밥 먹고 떠들고 하는 건 똑같고. 서로 볼 거 못 볼 거 다 봤고. 같이 씻기도 자주 해봤고. 한 침대에 드러누워서 잔 적도 많았고. 사귀거나 말거나 별로 다를 거 없지 않겠냐. 이 상태에서 좋아하니까 사귑시다 하는 얘기 들어봤자 별로 감흥도 없을 것 같은데. 낯간지럽기만 하고."

"그게 중요한 거야. 낯간지러운 거. 긴장이 필요하다니까. 그래서 내가 꽃이니 뭐니 준비하는 거라고. 구색 갖추고 진지하게 하면 좀 다르잖아. 평소랑."

"그건 그거고 인마. 그렇게 해서 사귄다고 쳐도 별만 다를 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다른 게 왜 없어."

"뭐가 다른데?"

"합의 하에 이렇고 저런 걸 할 수 있다는 거."


이렇고 저런 거. 순간 그게 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단어의 의미에 미처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불쾌한 얼굴을 드러냈다. 


"으아... 생각도 안 해봤네."

"당연한 거잖아."

"그렇긴 한데. 너랑 그런다는 게 상상이 안 돼."

"너무하네! 상처받는다고!"

"사실인 걸 어떡하냐!"

"상상이 안 되면 해보면 되지."

"... 진짜냐고..."


보쿠토는 볼이 짓눌릴 정도로 거칠게 쿠로오의 볼을 붙들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 시선을 돌려보려 애썼지만, 이 이상의 회피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양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통에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보쿠토군? 저는 지금 굉장히 턱이 아프답니다? 불만스럽게 말해보았지만 듣지도 않는다. 


곧 보쿠토의 입술이 쿠로오의 입술에 닿았다. 생각보다 말랑하고 부드럽고, 촉감이 썩 나쁘지 않은 것이... 기분이 더 이상하다. 쿠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보쿠토의 혀가 쿠로오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적셔왔다. 


"잠깐, 그런 것까지 하... 우읏..."


당황해서 벌어지는 입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혀. 그리고 그 혀를 통해 전해지는 아찔한 감각. 아 맙소사 내가 보쿠토따위에게 아찔하다는 단어를 쓰게 되다니. 


보쿠토는 조심스럽게 누워있는 쿠로오의 몸 위로 올라타 본격적으로 혀를 섞기 시작했다. 고개를 꺾으며 입술 사이로 작은 틈이 생길 때마다 새어 나오는 숨은 묘하게 거칠었다. 숨이 막혀오기 시작할 때쯤, 보쿠토가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냈다. 거친 호흡.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 잠시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쿠로오는 좀처럼 보쿠토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어떤데?"

"어떻긴 뭘 어때. 내려와. 잘 거야 이제."

"내 눈 못 보는 것 같은데."

"네가 이상한 자세로 있으니까 그렇잖아! 떨어져!"

"아아- 알았어. 밀지 마. 떨어진다고!"


쿠로오의 몸부림에 허우적대다, 보쿠토는 결국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강하게 부딪힌 통증에 앓는 소리를 내더니, 곧 킬킬대며 웃기 시작한다. 정신이 나갔나 저게. 쿠로오는 이불을 휙 뒤집어쓰고 엎드려 잠을 청했다. 침대가 흔들리며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지더니, 보쿠토의 근육 진 팔이 강하게 몸을 끌어안아 왔다. 


"떨어져라."

"나도 잘 거야. 침대에서 같이 자는 건 평소랑 다를 거 없잖아."

"붙어있지 말라고."

"싫어. 침대도 좁고. 내 집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래."

"하... 그러던가. 난 잘 거야. 진짜로. 자고 일어나서 얘기해. 방해하면 죽는다."

"그러던가-"


분명 방해하지 말라 했건만, 더 깊숙이 안아오는 팔을 쿠로오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잠은 진작 깨버렸지만, 지금은 잠들지 않으면 이 상황을 회피할 방도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잠을 정한다. 


"쿠로오."

"..."

"자?"

"잘 거야. 자라."

"자고 일어나면 이번엔 진짜 제대로 말할 거야."

"또 그소리냐..."

"피할 생각 하지 마. 꿈에서 대답이나 생각해둬라."

"..."

"잘자- 쿠로. 생일 축하하고."


낯간지러운 건 딱 질색이라 사실 생일파티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아무래도 올해 생일은 최악이 될 것만 같다. 자꾸만 뜨겁게 열이 오르는 몸에, 하여간 이 부엉이 자식은 몸에 열도 많다며 속으로 욕을 짓씹어본다. 목 뒤로 닿아오는 입술의 감촉을 애써 무시하며, 쿠로오는 머릿속에 양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의식의 흐름을 자꾸만 다른 곳으로 돌렸다. 


쿠로오가 잠드는 것보단 목 뒤로 닿아오는 숨소리가 고르고 느려진 것이 더 먼저였다. 그러나 쿠로오를 끌어안은 팔에선 도통 힘이 빠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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