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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츠키] 가랑비

츠키시마 생일 합작 수록




살을 에는 냉기가 움츠러든 몸을 후벼파던 때.

겨울의 찬 바람처럼, 가슴 한 편을 에는 듯이 네가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속에 얕은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언제고 그치지 않고 내릴 것처럼. 그리고 언제든 그쳐버릴 것처럼.

 

 

 

 


**

 

 


 

츠키시마 케이. 아마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 테지만 그는 처음부터 꽤나 눈에 띄는 편이었다. 갑작스럽게 여름 합숙에 참가한 타 지역 학교의 배구부. 그들의 상징인 까마귀처럼 무엇이든 먹어치우며 눈에 띄게 변화하는 화려한 팀플레이. 그중에서도 텐션 높고 떠들썩한 1학년들. 그가 속한 팀은 어떤 면으로든 자연스럽게 시선을 끄는 팀이긴 했지만, 츠키시마가 눈에 띄었던 이유는 그와는 조금 달랐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어필하던 그곳에서 유일하게, 일부러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그림자 뒤로 숨어있던 사람. 커다란 키, 안경,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조소 가득한 표정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더 힘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존재감을 숨기는 데에 꽤나 성공한 듯했다. 오히려 그 덕분에 오지랖 넓은 타 학교 선배의 눈에 제대로 눈에 띄어버렸지만.

 

아카아시 케이지. 츠키시마에게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한참 대답을 망설이다 ‘글쎄요. 잘 기억나지 않는데.’라는 대답을 돌려주었을 것이다. 대 에이스를 보유한 도쿄 강호. 그 에이스가 최고의 기량으로 날아다닐 수 있도록 코트 전체를 지휘하는 세터. 팀의 유일한 2학년 주전. 합숙 참가 학교 중 유일한 2학년 부주장. 어떤 면으로든 주목받을만한 출중한 선수였지만, 아카아시는 용케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선배들의 그림자 뒤로 숨어들어갔다. 최소한 츠키시마에게는 그랬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타인에게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였으니까. 츠키시마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시끄러운 두 선배에게 끌려갔다. 그 덕분에 아카아시는 좀 더 쉽고 자연스럽게 츠키시마를 관찰하고,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림자 뒤에 숨어있길 원했던 그때의 그에게는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조용히 다가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으니까.

 

처음엔 그저 눈에 띄는 타 학교 후배였을 뿐인데. 처음엔 분명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합숙이 거듭될수록 츠키시마의 한 발짝 옆에 아카아시가 있는 것이 점점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변해갔다.

 

 


 

**

 

 


 

옆에서 조용히 조언하고 챙겨주는 고마운 선배, 그리고 그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며 따르는 후배로.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거리를 그 이상 좁히지도, 벌리지도 않은 채로 반년 가까이를 보냈다. 선배와 나 사이에 남아있던 그 한 발짝의 거리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한 건 3학년이 은퇴하고 아카아시 선배가 주장 자리를 이어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올 무렵. 이제는 정기적인 행사가 된 도쿄 합숙이 다시 돌아왔고, 늘 그랬듯 우리는 함께 체육관에서 개인 연습을 하며 서로의 플레이에 대한 피드백을 나누고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목에, 허리에 닿아오는 선배의 손.

아, 이 사람이랑 거리감이 원래 이랬나? 문득 우리 사이의 거리에 생각보다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을 깨달았을 때, 이번엔 그의 입술이 닿아왔다.

이마에, 볼에, 귓가에.

그리고 다시 볼, 입술.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됐더라... 그런 생각이 아주 잠깐 머릿속에 스쳤던 것 같다. 아주 살짝, 그러나 거부할 수 없이 밀어 오는 힘에 몸이 기울고 등에 체육 매트의 푹신한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사라져버렸지만.

 

이제는 그가 어디로 어느 곳에 닿아오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을 정도로 거침없이 숨결을, 살결을 맞닿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도 오지 않는 체육 창고에서 처음으로 서로 몸을 섞었다.

입 밖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보다, 그렇게 몸을 맞대는 것이 더 빨랐다.

언어로 관계를 확정 지은 것은 그 바로 다음.

 

 

“사귈래?”

 

 

옷을 주워 입던 그가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을 때에야 이루어졌다.

분명 제대로 질문 형식을 띄고 동의를 구하는 말이었는데도 어쩐지 선언같이 들려와서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답지 않게, 그리고 나답지 않게 뜨거웠던 방금 전의 그 행위가 무색할 정도로 그의 고백은 무척이나 담백했다. 어쩌면 이게 가장 우리다운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선배- 그렇게 말보다 몸부터 나가는 사람일 줄 몰랐는데. 한참을 웃으며 놀릴 수 있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처음이 생각보다 좀 온도가 높았을 뿐이지, 그렇게 시작된 연애도 남들처럼 불타는 듯 뜨거웠던 것은 아니다. 그저 친한 선후배로서 적정 거리를 유지했던 두 사람이 이젠 간간이 살결이 스칠 만큼 가까워졌다는 정도. 거기엔 선배와 나의 오글거리고 찐득한 분위기에 질색하고 담백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성격도 한몫했지만, 그보단 서로의 물리적 거리라는 현실적 문제가 더 컸다. 미야기현과 도쿄 사이의 먼 거리는 가끔 서로 입술을 맞대거나 손을 잡는, 그 소소한 스킨십조차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열여덟과 열아홉. 몸은 이미 다 커버렸는데 속 알맹이는 아직 어렸던 그때.

우리의 연애는 마치 가을 하늘에 내리는 가랑비 같아서, 으레 어린 연인들이 그러하듯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치지도, 뜨겁게 타오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차가웠다.

 

 

“뭐,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 게다가 어쩔 수 없기도 하고... 큰 문제만 없다면 뭐 괜찮은 거 아닐까?”

 

 

선배와 내 관계에 대해 야마구치에게 설명해주었을 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이야기를 듣던 야마구치는 그런 답을 들려주었다. ‘괜찮아 츳키?’ 라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어보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딱히. 괜찮고, 말고 따지려던 거 아니거든? 하여간 오버야. 연애상담이라도 한 것 같잖아. 시끄럽다고 쏴붙여주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도리어 야마구치 얼굴에 걱정이 더 쌓여버렸지만.

하여간 가끔 보면 은근히 애 취급이라니까. 바보같이.

 

 

뭐 그 말처럼, 우리의 연애는 남들보다 담백하고 덤덤하다는 점이 좀 다를 뿐 큰 문제없이 이어졌다. 애정표현이 담백한 덕인지 사소한 다툼조차 없었다. 약간의 마찰이 있더라도 대부분 선배가 한 발 뒤로 물러나 받아주는 식으로 해소되곤 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어른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마냥 나를 애 취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점이 내가 그보다 여러 의미로 어리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곤 했지만. 그렇게 우리는 1년 가까이 선후배가 아닌 연인으로서 마주했다.

 

 

그리고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걸려온 전화.

 

 

“이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내가. 그리고 네가.”

아주 짧은 정적 뒤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선배의 목소리. 목적어도 없는 불완전한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굳이 되짚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요.”하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알 것 같았으니까.

 

 

선배가 졸업할 무렵,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의 일이다.

 

 

 


**

 


 

 

“그래요.”

 

아주 짧은 정적 뒤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의 목소리. 내가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는 그 말을 듣고도 그는 이 갑작스러운 이별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짧은 통화는 곧이어 이어진 “그럼 잘 자요.” “그래. 너도.”하는 일상적인 인사를 끝으로 끊어졌다. 매일 이어졌던 우리의 통화는 항상 이렇게 츠키시마의 굿나잇 인사와 나의 대답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통화 이후 서로 어떠한 연락도 주고받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평소와 조금 달랐던 점일 뿐이다.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것은 내 쪽인데, 헤어짐의 이유조차 묻지 않은 채 그러마했던 그의 태도에 도리어 상처라도 입은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오랜만에 만난 보쿠토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주절주절, 그렇게 헤어졌노라 떠들고 있었다.

 

 

“으음... 지쳤던 거 아니야? 츳키도 말이야. 보기보다 꽤 타오르는 타입이니까. 롱디는 아무래도 힘들긴 하겠지.”

“... 그런가요.”

“응. 뭐... 너희 그렇게 구구절절 나나 쿠로오한테 말하는 편도 아니고,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아- 그래도 지치는 것도 비슷했던 것 같아서 다행인가. 일단 나쁘게 헤어진 건 아니니까.”

 

너희 은근히 닮았으니까- 선배는 그렇게 덧붙이며 나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마셔, 마셔. 섭섭하긴 하지만, 좋게 생각하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쿠로오도 끌고 올 걸 그랬네. 그 자식 과 행사에 뭐에 불려 다니기 바빠 가지고 말이야. 하여간 그 오지랖은 날이 갈수록 커져.”

“쿠로오씨한테는 선배가 요약해서 말해주십쇼. 뭐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만한 것도 아니고. 매번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알았어- 삐질 것 같긴 하지만. 아카아시보단 츳키한테 더 귀찮게 굴 것 같은데.”

 

 

어깨를 한 번 크게 으쓱해 보이곤 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츳키도, 라. 지쳤을 것이다. 그는 분명. 선배의 말대로 츠키시마는 속에서 타오르는 열기를 시시하다는 듯 연기하며 포장하는 버릇이 있었다. 비록 그가 아직 어렸던 데다 내면은 그보다 더 어려서, 조금만 건드리면 금세 벗겨질 정도로 어설픈 포장이긴 했지만. 어설펐던 데에는 그 자신이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다. 일단 이 보쿠토 코타로가 정확히 짚어낼 정도니까. 나름 분위기를 읽어내는 데에 자신 있는 내가 그 포장을 뜯어내고 다가가기는 너무나 쉬웠다. 그저 좋은 선배인 양 주위를 맴돌며 벌였던 길고 긴 탐색전이 우스웠을 정도로.

 

난 또 뭘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고 있나. 누가 보면 내가 차인 줄 알겠네. 찼거나 차였거나 따지는 일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나마도 먼저 입을 열었던 내가 할 말은 아니니까. 상처는 내가 다 받은 양 이러고 있는 꼴이 우스워서, 이번에 내가 스스로 잔을 채워 다시 입에 털어 넣었다. 자작은 안 돼! 선배가 소리치며 본인의 빈 잔을 테이블에 꽝꽝 두드린다. 하여간 시끄러워. 이 사람도 하나 변하질 않네. 그 모습이 괜히 얄미워 잔이 넘치도록 술을 채워주었다.

허겁지겁 한 번에 털어 넣는다. 바보 같긴.

 

 

보쿠토 선배와 한참 퍼마신 그날 이후, 그에 대한 기억을 덮어두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 역시 나의 감정을 덮어두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니까. 우리의 연애가 지독히도 고요했던 덕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앓았던 첫사랑은 아직도 가슴 한 편에 멍울처럼 남아있었으나, 그 위에 낙엽처럼 시간이 차곡차곡 덮여 일부러 건드리지 않는 이상은 아프거나 하지 않았다.

 

 

 

 

1년의,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연애. 이별. 그 이후 또다시 1년이 흘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찌는 듯한 더위가 온몸을 뒤덮을 무렵.

그를 다시 만났다.

 

 

 

“... 츠키시마?”

“아...”

도쿄. 그것도 캠퍼스 한복판에서.

 

 

 

아마 서로 꽤나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거나, 쿠로오씨와 보쿠토 선배가 그를 초대한 모임에 나도 낀다거나 하는 상상을 안 해보았던 것은 아니지만... 여긴 길 한복판도, 술집도, 그렇다고 교내의 외부인이 자주 들리는 곳도 아닌 강의동 바로 앞이다. 캠퍼스 꽤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아, 저 여기 다녀요. 수업은 이 건물이 아니지만.”

“전혀 몰랐네. 오며 가며 한 번쯤은 봤을 법도 한데. 수업은 보통 어딘데?”

“과학관이요. 생명과학 쪽이라. 경영관이랑 멀잖아요 거긴. 자취방, 후문 쪽이기도 하고.”

 

 

정문 쪽으론 잘 안 다녀서요. 그는 흘끔 나를 쳐다보더니 그렇게 덧붙였다. 아, 그렇군. 자취인가. 우리 둘은 그렇게 건물 앞에 서서 짧게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둘 사이에 벌어진 어색한 거리감이 새삼 낯설다. 연인 사이의 이별 때문에 생긴 어색함이라기보단, 그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나눴던 대화에서 느꼈던 어색함이다. 그렇게 상투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술 한 잔 살 테니 연락해. 그래요. 상투적인 인사를 끝으로 서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마주치지 않는 이상 이 짧은 대화도 나눌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날 밤 츠키시마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금요일 어때요? 7시 정도면 끝나는데」

「좋아. 그때 정문에서 봐」

 

 

짧고,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두 통의 문자로 우리의 다음번 만남은 너무나 쉽게 성사되었다. 어쩐지 우리의 연애와 퍽 닮아있는 이 두 통의 문자에, ‘아아- 정말 끝난 거구나 우리.’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오는 듯 안 오는 듯 내리는 가랑비 같던 연애. 여태 비가 그친 줄도 몰랐던 걸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떠올리는 내가 있다.

 

비가 그쳤구나. 그만하면 오래 내린 건가.

남들은 폭풍 같은 사랑을 한다는데, 사랑을 굳이 비에 비유하자면 우리의 연애는 가랑비에 가까웠다. 아- 뭔가 내리긴 하는구나, 하고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우산이 오히려 귀찮게 느껴지는 가랑비. 큰 웅덩이가 생기지도 땅이 질퍽해지지도 않고, 촉촉해 보이는 흙바닥을 헤집어보면 퍽퍽한 속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주제에, 지독히도 오래 내리는 그 비처럼.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계속해서 내렸다. 남들이 보기엔 꽤나 오래가는, 안정적인 커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어린, 남고생과 남고생, 연상연하, 다른 학교, 다른 지역, 도쿄와 미야기현 사이, 롱디. 헤어지려면 진작 헤어졌을 요소가 이렇게나 많은데 큰 갈등도 없이 1년 가까이를 사귀었으니까.

 

결국 마지막은 그것 때문인 건가.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지만.

 

짧은 만남과 짧은 대화. 그러나 기억이란 참으로 가벼운 것이어서, 그 부질없는 만남만으로도 어설프게 덮어뒀던 그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기엔 충분했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기억의 물줄기는 틈만 나면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꽤 많이 남은 줄 알았던 그와의 만남은 어느새 30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 보면 보쿠토선배, 우리가 서로 닮은 구석이 많다고 했었나. 선배 생각보다 날 아직도 잘 모르네. 뭐, 연애하는 내 모습은 모르는 게 당연한가. 연애는 자기도 모르던 모습을 꺼낸다고 하니까. 서로 분위기가 닮았다던가 하는 말이야 많이 들었지만, 속 알맹이는 꽤 다를지도 모른다.

 

장거리 연애에 불만이 전혀 없었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마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의 제대로 만나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가슴 한 쪽이 찌르르 한, 처음 사귀기로 한 날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나라고 그 순간이 떨리지 않았을 리 없다. 말랑한 입술의 촉감에, 부드럽게 뒤로 넘어가던 그의 몸에 비정상적으로 뛰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밤. 그와 만날 때마다 그때와 같은 속도로 뛰는 심장은 이제껏 만나지 못 했던 아쉬움을 메워줄 정도로 꽤나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오히려 그곳에 있었다.

만날 때마다 마치 오늘 사귀기 시작한 풋풋한 연인처럼 찾아오는 가슴 찌르르 한 설렘과 갈증.

그래. 해소되지 않는 그 갈증.

 

 

그에게 손을 뻗을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손. 뗄 수 없는 시선. 초조함. 집착. 소유욕. 강박. 갈증. 이 병적이고 비정상적인 감정.

이 갈증을 버틸 수 없는 시기가 조만간 찾아올 것임을 알았다.

그 갈증이 나의 연인을, 츠키시마 케이의 목을 조르리란 것도.

아카아시 케이지는 그런 사람이다. 겉으로 평정을 연기하면서 사실 지독할 정도로 병들어 있는 그런 사람.

 

스스로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이런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손을 물렸고, 시선을 거뒀다. 둘 사이에 다시 애매한 거리감이 생겼다. 그러자 이제는 츠키시마가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툴게, 최선을 다해서.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옷 끝을 잡았다. 그게 나를 더 미치게 하는 줄은 모르고.

 

보기보다 꽤 뜨겁고 어린 내면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는 버티기 힘든 것이었을 터이다. 서로 손을 마주 잡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우리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 그리고 내가 끝끝내 좁혀주지 않았던 정신적 거리와 신체적 거리. 그 이상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한 발짝의 그 애매한 거리감. 지쳐갔을 것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버틸 수 없는 것은 내 쪽이었다. 더 이상 나 스스로를 컨트롤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손을 놓기로 했다. 아카아시 케이지와 츠키시마 케이. 닮았지만 다른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아니, 사실은.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간 나 자신을 보기 싫었던 걸지도.

 

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머리를 세차게 두어 번 도리질 쳤다. 표정 없는 얼굴을 덧씌우고 멀리서 걸어오는 츠키시마를 향해 살짝 손짓했다.

그가 고개를 한 차례 꾸벅. 다가온다. 덥다, 오늘은 좀 심하네. 그러게요- 아,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강의가 늦게 끝나서. 아냐, 가자.

자리를 옮겼다.

 

 

 


**

 

 

 


술집에 들어가 가볍게 한 잔씩 걸치면서도 그들 사이의 대화에는 딱히 이렇다 할만한 것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잠시 가까이 지냈던 선후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대화. 그 시절의 그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이 사실은 1년을 서로 탐색하고 1년을 사귀었던 사이였음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부재했던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하는 정도로도 대화는 무리 없이 술술 흘러갔다. 어색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함께 한 1년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둘 중 누구도 그 시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이것이 오히려 그들 사이의 대화가 막힘없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단지 그 이상 들어가지 않을 뿐이다. 가랑비처럼.

 

 

막차가 끊기기 전, 그들은 적당히 취기가 오른 기분으로 헤어졌다.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이들이 사실은 7시쯤부터 꽤 오래 술을 먹고 떠들었음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던 그 만남은 아슬아슬 잘도 이어졌다. 만남이야 산발적이고 횟수도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만남 사이사이에 역시나 드문드문 이어진 문자가 그들의 가느다란 관계를 계속 이어주었다. 어쨌건 이제 같은 학교니까, 행동반경도 생활도 비슷해진 덕분이라고.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담백한 만남이 이어지면서 어느새 더위가 꺾이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찾아왔다. 만난 건 얼마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만날 때마다 딱히 장소 고민 없이 처음 갔던 그 술집으로 향했기 때문에, 어느새 아카아시는 츠키시마와의 만남이 있을 때에만 그곳에 가게 되었다. 사실은 신입생 때부터 자주 들르던 단골 술집이라고, 언젠가의 만남에서 츠키시마에게 말해주었던 것 같다. 적절히 조용하고, 안주도 꽤 괜찮은 편이라 문득 생각 나곤 하는 곳. 아, 그러고 보니 땡기는데. 쌀쌀하고 건조한 바람에 어쩐지 입이 텁텁하게 말라 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츠키시마에게 연락을 넣었다.

 

 

「한 잔 할래? 날도 쌀쌀한데.」

「언제는 쌀쌀해서 갔나. 좋아요.」

 

 

역시나 그들의 만남은 쉽게 성사되었다. 만나는 곳과 시간은 항상 정해져 있다. 오후 7시, 정문 앞.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확인하려 다시 켠 화면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랗게 쓰여 있는 시간이 아닌, 그 위의 날짜. 아, 그러고 보니 생일 얼마 안 남았던가. 생일에 다시 만나자니 텀이 너무 짧은 것 같고, 그렇다고 모르는 척 넘어가자니 이미 깨달아버린 이상 기분이 영 찝찝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생일이나 챙겨주자는 심산으로 약속을 다시 조정했다. 츠키시마의 성격에 생일이라고 친구 여럿을 불러다 왁자지껄하게 지낼 것 같지도 않고, 술이나 사줄 겸. 어쩐지 챙기고 싶기도 하고. 답장을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다 보니, 「뭐, 좋아요.」하고 답장이 왔다. 단골 술집에 가는 대신, 집으로 돌아가는 아카아시의 손에는 맥주 캔 두어 개가 들은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졌다.

 

 

생일이란 단어를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굳이 그날 만나자고 한 이상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잡았던 약속을 취소해가면서까지 만나자고 한 것은 아카아시 케이지 본인이다. 작은 선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만나기로 한 날과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간. 그는 뭔가 눈에 띄기만 하면 ‘이건 어떤가.’ 한 번 머리를 굴려보고, 한 번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건 딱히 뭣도 아닌 사이에서 챙겨주기엔 너무 과한 것 같고, 그렇다고 저건 너무 성의 없고, 도통 고를 수가 없었다.

 

아. 어렵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츠키시마의 생일이 찾아왔다. 결국 아카아시의 손에는 작은 케이크 상자가 들려졌다. 괜찮은 전문점을 굳이 찾아가기도 애매해서 그나마 케이크가 제법 괜찮다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 갔고, 홀케이크는 또 너무 과한 것 같아 조각 케이크를 골랐다. 다 큰 남자 둘이서 하나 나눠먹기도 좀 그러니까. 두 개. 답지 않게 별걸 다 걱정한다고 자책하면서 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츠키시마가 그를 발견하고 손짓하다가, 아카아시의 손에 들린 작은 케이크 상자를 발견한다.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휘어졌다가,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은 뒤 술집으로 들어갔다. 적절한 소음, 테이블마다 낮게 파티션이 쳐져 있는 아늑한 술집이다.

 

 

 

“뭐예요 그건?”

“생일이잖아. 뭐, 일단은. 초 켜고 노래라도 불러줘?”

“아, 싫어요. 딱 질색이야. 선물은?”

“꽤 뻔뻔해졌네. 없어.”

“에- 챙겨주려고 일부러 부른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잘 못 고르겠더라.”

“푸하! 너무 열심히 골랐다든지?”

“그러게. 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그야. 전엔 서로 갖고 싶다고 했던 것 중에 적당히 골라서 챙겼으니까.”

“적당히는 아니었는데. 그랬었나 봐?”

“이상하게 말 돌리지 말구요. 안 그랬어요.”

 

 

 

그동안 좀처럼 나오지 않았던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작은 조각 케이크 앞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때는 이랬는데 저랬는데 하고 서로의 기억을 하나씩 꺼낸다. 생각보다 제법 즐거워 술의 목 넘김도 좋다. 사귀기 전부터 사귀기 시작했을 때, 한창 연애할 때를 이야기하다 보니 생각보다 할 이야기도, 처음 듣는 이야기도 많았다. 주로 그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떨어져 있던 때의 이야기다. 그런 건 왜 말 안 하는데? 아, 좀 그렇잖아요 뭘 그렇게 하나하나... 그렇게 투닥거리기도 하면서, 서로의 술잔을 채운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들이 이별할 즈음으로 다다른다. 붕 떠있던 기분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건 이별 이야기.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어쩐지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아래로 향해있는 시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닫힌 입. 식어빠진 안주. 애매하게 남은 술, 텅 빈 케이크 상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딸기 꼭지 두 개.

 

 

“그러고 보면 우리, 별로 다를 것도 없네요. 사귀기 전이나, 사귈 때나, 헤어지고 나서 이렇게 만날 때나.”

“그러게. 그럼 굳이 시작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애매하게 붕 뜨기만 했잖아.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

“그러게요. 그리고.”

 

 

 

굳이 끝낼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애매하게 붕 뜨기만 했잖아요. 별로 다를 것도 없이.

 

 

말을 끝마친 츠키시마 케이는 고개를 들어 아카아시 케이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아카아시 케이지는 고개를 들어 츠키시마 케이를 바라보았다.

 

 

 

츠키시마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때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아카아시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굳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당시의 자신을 잠시 돌아보았다. 열아홉. 나이에 비해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룰 줄 알던 그때의 아카아시가, 으레 그 나이 아이들이 그러하듯 미처 잡아 붙들어놓지 못한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던 그 시절.

 

 

“갈증이, 너무 심했어. 계속 심해지더라고.”

“...”

“널 옭아맬 거라고 생각했어. 너와 나는 다르니까.”

 

 

커지는 소유욕, 집착. 커져가는 갈증. 답답함. 이런 단어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애매하게 말했지만, 츠키시마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아카아시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었다. 그가 남들에게 자주 보여주던 비웃음, 혹은 가끔 보여주던 냉소가 아니라.

오직 아카아시에게만 보여주던, 아이같이 말간 웃음.

 

 

“아, 다행이다. 난 만약에 나랑 달랐던 거면 어쩌나 했지.”

“달라?”

“네. 비슷한 걸로 답답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신이랑 나, 생각보다 많이 닮았으니까.”

“...”

“미치는 줄 알았어요, 저도. 지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만날 때마다 잡아두고 싶어서.”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아카아시가 입에 담지 않았던 그 단어들을 고스란히 그의 목소리에 담아 들려주었다. 그런 것들을 느꼈노라고. 아마 아카아시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가 여러 후보 중에 이 대학에 진학한 것도, 자신과 같은 이유로 힘들었다면 아마 그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여주기 싫은 자신의 미친 내면을 숨기느라 고생하느니 차라리 서로의 눈앞에서 다 보여주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지망하는 학과도 다르니까. 혹시라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면 다시 적당히 거리를 벌리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그 다운 보험도 하나 마음에 심어두면서.

 

만나보자는 마음을 먹은 후엔 일부러 동선을 크게 돌아 경영관 주변을 서성였다고 했다. 만나는 것은 좋지만, 우연을 가장할 필요가 있었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상황을 상상하고, 속으로 무덤덤한 말투를 연습했다.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그 만남이 실현되는 순간, 훌륭하게 연기를 마친 본인이 내심 대견했다. 마음이 급해 자취를 하고 있고 그것이 후문이라는 쓸데없는 말까지 줄줄 내뱉는 실수를 하긴 했지만. 실수긴 했지만 아카아시가 그 말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아 조바심이 났단다. 사실은 자기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봐. 그래서 더 다가갈 수는 없었다고,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츠키시마가 가진 집착은 더 커지는 통에 지지부진한 그 만남을 계속 이어갔다. 조곤조곤 그간의 심정을 늘어놓은 그가 후련하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묻었다.

 

 

“학교 좀 적당한 곳으로 가지.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이번엔 멍하니 있던 아카아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안개꽃 봉우리가 만개하듯 얼굴을 한가득 채우는, 츠키시마가 좋아하는 그 웃음.

 

 

“선물 줘요. 내가 갖고 싶은 걸로.”

“뻔뻔하긴.”

“줄 거잖아요.”

 

 

아카아시가 자리에서 살짝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너머로 몸을 기울인다. 츠키시마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한 차례 볼을 쓰다듬고, 입술을 맞댄다. 담백한 고백으로 마음을 표현한 후 짧게 입술을 맞대던 그때처럼.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혀를 섞는다. 츠키시마의 팔이 아카아시의 목에 둘러진다. 그곳에 오로지 둘만 남겨진 것처럼,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길었던 갈증을 해소하듯,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을 다소 급하게 삼켰다.

 

 

 

 

비가 내린다.

그친 줄 알았는데. 워낙 가늘어서 착각했던 건지, 신발과 바짓단은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있다.

말리려면 꽤나 시간이 들 것이다.

그리고 빗방울이 점점, 빠르게 굵어진다.

 

 

비는 아마 꽤 오랫동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산은 꺼내지 말고 양껏 젖어보자고, 그들의 눈에 아이 같은 웃음이 걸렸다. 








출처: http://jingjinglim.tistory.com/14 [임징징이 의식 저장소]

2016년 9월 27일 티스토리 업로드_포스타입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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