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다들 과일을 나눠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내 호의가 이 사단을 만들어 낼 줄은.. 

 

 



[Cherry]

 

 



 

"오정, 같이 장보러 안 갈래요?"

"앙? 갑자기 뭐야?"

 

잠에서 덜 깨 더듬이가 삐죽삐죽 제멋대로 뻗어나간 그가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로 되물어온다. 요 근래 이 시간에 깨어있는 그를 보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다. 한동안 일찍 들어오던 그가 (그래 봤자 자정이 다 되어야 돌아오는 형편이지만) 최근 다시 포커판을 기웃거리는지 새벽 3시~4시로 귀가 시간을 늦췄기 때문이다. 귀가가 늦으니 당연히 기상도 늦어질 터. 덕분에 오전에 장을 보러 가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가도 매일같이 혼자 장을 보고 짐을 정리하는 게 계속되면 슬슬 이건 아니다 싶어지는 법. 오늘은 작정하고 그가 몇 시에 집에 들어왔건 상관하지 않고 그를 흔들어 깨웠다. 지금은 오전 9시. 결코 이른 시각은 아니다. 물론 '보통' 사람들 기준에서지만.

 

 

"갑자기.. 라니 좀 서운하네요. 지금 먹고 있는 토스트는 누가 사온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걸 모른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난 다섯 시 넘어서 잠들었다고. 잠이 부족하단.."

"지금 먹고 있는 스프는 제가 몇 시에 일어나서 끓인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아아. 그렇군요. 저는 아침을 먹지 않으면 건강이 망가진다던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오정의 수면시간만 빼았은거군요?

"...이봐"

"그럼 더 주무셔요. 방해꾼인 저는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무거운 짐을 혼자 이고 지고 장을 보고 올 테니까. 아, 잠이 아직 덜 깼을 테니 목 넘김도 안 좋겠네요. 스프그릇 이리 주세요. 필요 없죠?"

 

그가 이제 막 숟가락으로 내용물을 떠올리던 스프그릇을 집어가려 팔을 뻗자 그가 내 손목을 빠르게 붙잡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냐. 미안. 갈게. 짐도 다 내가 들께." 하고 항복 선언을 해온다

 

...진작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묘하게 얄미워서 모르는 척 스프에 소금이라도 한 스푼 넣어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짐까지 다 들겠다는 말에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왜 꼭 오전부터 장을 보러 가야 되는데? 오후에 일 없잖아?"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다가 흘끗 달력을 보던 그가 나에게 물었다. 확실히 오늘은 오공의 가정교사 일도 없는 날. 용케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속으로 감탄하며, 그의 눈앞에 전단지를 들이밀었다. 놀라서 커진 눈을 껌벅이며 '그래서 이게 뭔데?'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조금 바보 같다.

 

"그야, 오늘은 특별 할인기간 첫날이니까요. 일찍 가지 않으면 좋은 건 다 빠지고 없어요."

"하.. 가정주부 다 되셨네."

"그런 말 마세요. 합리적인 소비는 중요한 거라구요. 괜찮은 게 있으면 이번 기회에 미리 사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전단지를 훑어보던 그가 '오 이건 좀 끌리네' 라며 보여준 페이지에는 빨갛고 큰 글씨로 '수입과일대축제'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아아. 안 그래도 그걸 둘러보려고 해요. 괜찮은 게 있으면 저녁에 삼장들이랑 같이 먹죠. 아, 저녁은 다 같이 먹기로 한 거 알고 있죠?"

"아앙?? 들은 적 없어 그런 건. 언제 정한건데?"

"아.. 미안해요. 제가 말하는 걸 잊었나 봐요. 어제 오공 과외가 끝나고 얘기가 나왔던 거라서. 하긴 잊지 않았더라도 어젠 말할 기회가 전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지금 알았으니 됐잖아요?"

"...이봐"

"그러니까 저녁 일정은 비워두세요."

 

등 뒤로 항의하는 듯한 동거인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만, 나는 무시하고 장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두 명이 더 왔을 뿐인데 좁은 집은 금새 꽉 찼다. 손님은 늘 그랬듯 오공과 삼장. 어느새 저녁을 다 먹고 힘이 넘치는지 오공과 오정은 금새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장을 보는 내내 불만이었으면서, 사실 다같이 먹는 저녁을 꽤 즐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역시 오정이 먼저 시비라도 건 것이겠지. 늘 오공을 어린 애라고 놀리는 그였지만, 사실 다 큰 어른이 매일 저러는 게 더 어린 애 같다는 것을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다.

 

"..시끄러워.."


식후 차라도 대접할 겸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니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잘생기다 못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얼굴을 항상 미간의 깊은 주름과 험한 언동으로 망치는 그가 깊은 한숨과 함께 찻잔을 흘긋 바라보았다. 짜증은 내고 있지만 아직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인내심이 얼마나 단시간에 끊어지는지, 그리고 그 이후 모든 뒷수습은 결국 누가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화제를 돌릴 것이 없나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아 그러고 보니 과일을 내온다는 걸 깜박했네요. 같이 드시겠어요?"

"오오? 먹을래 먹을래!"

오공의 즉각적인 반응. 역시, 효과는 탁월했다.

 

 

"수입 과일을 할인하고 있길래 몇 개 집어왔어요. 이런 건 평소엔 비싸서 먹기 힘드니까요."


자몽, 망고, 망고스틴, 체리 등등. 과일로만 한 상이 차려졌다. 평소 잘 못 먹는 과일을 보아서인지 오공은 한껏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꽤 많은 양을 샀다고 생각했는데 과일은 금새 동이 났다. 이 정도면 오정을 고생시켜가며 장을 보러 간 보람이 있는지도.

 


"오오- 그러고 보니 체리꼭지로 매듭을 묶을 수 있으면 키스를 잘한다던데. 해볼래 오공?"

"엑 그게 뭐야. 해본 적 없어 그런 거."

"오정. 오공에겐 너무 이른 이야기 같네요."

"원숭이니까 의외로 혀 움직임이 좋을지도 모르잖아. 하긴 뭐 어린 애가 뭘 알겠냐마는."

"윽. 그런걸 혀로 어떻게 묶어! 그러는 오정은 해본 적 있어? "

"나아-? 당연하지. 테크닉 하면 사오정이라고. 어디의 꼬맹이나 땡중이랑은 달라!"


오정은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듯 외치더니 '어디 그럼 시범을 보여줘 보실까-'라며 체리 꼭지를 떼어다 입에 넣어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런 언사는 오공의 교육에 좋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테크닉이 뭐야?'라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오공을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외면했다. 이래선 한심하단 표정으로 오정을 바라보는 그의 보호자를 볼 면목이 없다.

 


"하하! 보라고! 자 어때!"


오정은 자신 있게 혀를 내밀어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믿을 수 없게도 매듭이 아니라 리본 묶기를 해놓은 것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아니.. 저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니었던가.


"오오!! 오정 대단해!! 어떻게 한 거야 이거? 나도! 가르쳐줘! 나도 해볼래!"

"..이건.. 엄청나네요 정말.."

"...쓸데없는 재주로군."

"하! 보라고. 이런 건 어설프게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라니까. 어디의 누구씨들이랑은 다르다 이 말이야."

"하지만 별로 부럽단 생각은 안 드는군요."

"앙? 혀 테크닉이 좋은 건 대단한 거라고! 너도 사실 못하는 거 아니야?"

"뭐… 해본 적은 없긴 하지만."

"이 김에 해봐. 자가진단 뭐 그런 거지. 자자."

 

손수 체리꼭지까지 따다가 건네며 재촉하는 통에 어느새 나도 체리 꼭지를 받아 들어 입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어째 페이스에 말려들어가는 것 같은데.. 예감이 좋지 않다.

 


"그나마 있다는 재주가 이런 거라니. 한심한 놈."

"아앙? 그러는 삼장법사님은 할 수나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시나?"

"그런걸 해서 뭐 하는데?"

"잘나가는 남자에게 테크닉은 필수지. 아아. 그러고 보니 경험이 없으셔서 모르시나? 체.리.보.이.쨩?"

"...죽어야 성에 차나보군"

"저기. 그래서 그 테크닉이라는 게 뭔데?"

"성공이나 해보고 말씀하시지! 자 오공 너도 해봐. 혀로 매듭을 묶으면 돼. 자자."

 


기어코 그는 억지로 삼장과 오공의 입에 체리꼭지를 밀어 넣고야 말았다. 삼장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불안하다. 괜찮을까..

 

 

"어때 어렵지? 이게 쉬운 게 아니라니까?"

"뭐.. 의기양양 하신 데에 초치는 것 같지만 일단 하긴 한 것 같네요."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한껏 코가 높아져 있는 그에게 체리꼭지 매듭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생각보다 쉽지 않기는 했지만, 체리 꼭지의 가운데에 제법 그럴싸한 매듭이 지어졌다.


"호오.. 팔계 제법..? 어이 삼장. 네놈 날 무시했다 이거지? 저 꼬맹이는 그렇다 치고, 팔계도 성공한 이상 네놈은 도망갈 수 없어. 어이! 뱉지마!"

"필요 없어. 내가 네놈 말을 들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뭐야. 천하의 삼장법사님께서 자신 없으신가 봐? 하긴 저 꼬맹이나 무경험자인 너나 거기서 거기겠지."

"웃기지마. 죽고 싶냐."

"그럼 해보라 이거야. 아니면 이 오정님께서 친히 가르쳐드려야 하나? 삼장 어.린.이.님."

 

 

쓸데없는 싸움이 또 다시 시작될 것 같은 눈치다. 애초에 왜 이런 것 때문에 서로 이를 갈며 노려보는지 모르겠지만, 오정은 그 동안 쌓였던 것을 이 기회에 풀겠다는 듯 삼장을 자극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쯤에서 이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그 이전에 오정이 자신의 발언이 가진 힘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아 지적해주기로 했다.


 

"...그건.. 꽤 위험한 발언 같네요."

"엉?"

"그렇잖아요. 애초에 체리꼭지로 매듭을 잘 묶는다는 건 키스를 잘 한다는 얘기니까… 입 안에서 매듭 묶는걸 보여줄 수도 없고 말이에요."

"...이봐."

"오정 취향이 미인이라는 건 알겠는데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존중해줄게요. 전 그렇게 편협한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미쳤냐?!"

"..그냥 둘 다 죽어."


삼장이 진심으로 역겹다는 표정으로 나와 오정을 쳐다보았다. 오정은 왜 이야기가 그 쪽으로 튀냐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다시 생각났다는 듯 체리꼭지를 들고 삼장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 잘난 태도는 어디 가시고 발뺌이셔? 못 하겠으니까 괜히 도망가지 마시죠, 퓨어가이님?"

"그딴 쓸모 없는 잔재주 자랑에 내가 왜 장단을 맞춰야 하지? 내세울게 없으니 별걸 다 가지고 난리로군. 무능한 놈."

"...이게 진짜.."

"저기.. 이제 그만 이 무의미한 싸움을 끝내지 않겠어요? 시간이 늦었.."

"비켜 팔계! 내가 저 싸가지 없는 놈 콧대를 꺾어놔야 성이 풀리겠다. 그 무능한 놈의 잔재주도 못 따라하는 게 어디 누구시더라-?"

"해보겠단 거냐?"

"오냐. 내가 오늘 네놈이랑은 끝장을 봐야겠다!"

"그러니까 다들 진정..!"

 

 


와장창!

 

 


도대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싸움이 극에 달하는가 싶더니 오정이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났고 삼장의 앞에 놓여있던 찻잔이 떨어져 박살이 나고야 말았다. 체리 매듭을 가지고 언쟁을 하는 사이 식어빠진 녹차는 삼장의 옷과 발을 죄다 더럽혀 놓고야 말았다.

 


"너어.. 이 자식이.. 죽고 싶으면 곱게 죽여달라고 해!!"


삼장의 외침. 이어지는 총소리. 와장창 뭔가가 뒤집어지는 소리. 머리가 아찔해져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거지? 뒷수습은 언제 다 하지? 아아.. 깨진 것 치워야 하는데… 앞으로의 고생이 눈 앞에 훤히 그려지는 것 같아 싸움을 말릴 기력도 나지 않는다.

 


 

"팔계! 이 체리 진짜 맛있다! 더 없어?"


체리가 한 가득 들어있던 바구니가 텅 빈 채로 오공의 손에 들려있다. 바구니 안에는 체리 씨와 체리꼭지만 가득하다. 체리꼭지...체리꼭지…


"하하… 아니요 더 있어요. 다 드세요 오공. 전부 다."

 

바구니에 남아있던 체리를 죄다 쏟아 넣고, 오공이 신나게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어른의 난동으로 시끄럽지만, 이미 그 소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 기상 시간은 오전 일곱 시. 오랜만에 아침 조깅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아침 청소는 오정이 해줄 것이다. 기필코 깨워놓고 나갈 테니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세 번 정도 들린 것 같다. 싸움이 길어질 수록 고생하는 건 그 본인이겠지. 말리지 않을게요 오정. 진짜 삼장 총에 맞아 죽지는 말아요. 그럼 이건 다 제가 치워야 할 테니까요.

 

 

 

 

 

 

 

 

 2014년 3월 19일 이글루스에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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