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 주제: "츠키시마가 불면증에 걸렸다"

월간 쿠로츠키: http://psj021162.wixsite.com/blackmoon










새벽 4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잠들었을 시간. 창밖을 보아도 가로등 불이 비치는 불그스레한 빛 외에 불이 켜진 곳은 거의 없이 고요하다. 츠키시마 역시 평소라면 이미 깊이 잠들어 주변의 작은 소음은 인지도 하지 못한 채 잠들었을 시간.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고 몸에 이불을 둘둘 만 채 깨어있다. 앞으로 3시간 뒤면 그가 잠을 잤건 안 잤건 간에 가차없는 알람 소리가 그에게 일어나라 재촉할 것이다. 3시간은 자야 한다. 오늘은 수업도 많고 팀 과제까지 있는데. 아 젠장 제기랄. 양도 세어보았고, 잔잔한 음악도 틀어봤으며,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해보고, 따뜻한 우유도 마셔보았다. 숙면에 좋다는 온갖 방법을 모두 써보았지만 정신은 오히려 점점 맑아질 뿐이다. 아니지. 정신이 맑아지는 거면 다행이지. 차라리 일어나서 빠르게 하루를 시작하면 되니까. 문제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는 사실이다.

 

 

 

평소에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던 시계 초침 소리가 강하게 귀를 때린다. 아아 젠장. 날이 밝으면 당장 저것부터 무소음 시계로 바꿔야지. 신경 쓰지 않으면 들리지 않겠거니 하고 다른 곳에 신경을 던져보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초침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점점 소리가 더 커지는 것 같아.

그럴 리 없는데도.

 


자야 할 시간에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꼬박 날을 샌지 벌써 일주일째. 이제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고, 머리는 멍하며 몸도 어쩐지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필기를 할 때면 손이 떨려오거나 멍하게 있느라 누군가 한참을 불러야 번뜩 대답하기 일쑤다. 잠이 모자라 지친 몸은 시위라도 하듯 일상의 온갖 곳에서 잠이 모자라다 빨리 나를 재워라 아우성을 치고 있다. 알아. 나도 안다니까. 잠들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그럼 잠들어야 할 것 아니야.

 


한참을 잠들어라, 잠들어라 제 몸에 되뇌며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지친 몸은 기절하듯 잠에 빠져든다.

바로 그다음 순간 알람이 울려버리긴 하지만.

 




아아 젠장.. 젠장. 방금 잠들었다구..

 


눈치 없이 울리는 알람을 조금 신경질적으로 잡아 끄고 시간을 보았다. 오늘은 두 시간인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가뜩이나 아침이 약한 그였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몸짓이 곧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아 조마조마했지만, 그는 용케 벽을 붙잡고 다리를 질질 끌어가며 욕실 문을 열었고, 조금 찬물에 몸을 씻어가며 돌아오지 않는 정신을 붙들었다. 피곤하다. 하지만 나가야 했다.

 

 

찬물로 씻어가며 강제로 머리를 깨우면, 이미 몸에 익은 아침 준비의 과정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 법이다. 씻고,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든다. 아침밥은 거른다. 아침식사야 원래도 자주 거르곤 했지만, 요 근래에는 유독 더 입안이 텁텁해 식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리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겉옷을 챙겨 입고 밖을 나섰다.

 

 

이제 살을 파고드는 바람이 제법 차다. 가뜩이나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추위를 타는 츠키시마에겐 너무나 가혹한 계절. 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코트를 붙잡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정신없는 몸을 이끌고 버스를 잡아탄다. 사람에 부대낀다. 원래 이 시간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나. 돌이켜 생각해보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에 치이는지, 아니면 몸이 그저 그렇게 흔들리는 건지 분간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 일주일이면 슬슬 한계가 올 만도 하지. 그러나 몸이 천근만근이거나 말거나, 일상은 잔인할 정도로 쉼도 없이 바쁘게 흘러간다. 그리고 꼭, 이런 날은 일진도 안 좋은 법이지. 오늘따라 수업은 늘어지고 늘어져 쉬는 시간까지 넘기고 말았고, 급히 달려간 다음 수업은 강의동이 한참 먼 탓에 출석을 부르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과제를 냈지. 교수님. 저는 이 수업만 듣는 게 아니에요. 당연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불만을 입안으로 짓씹은 채, 팀 과제 미팅을 들어갔다. 들어가야 했다. 취소됐지만. 10분 전에.

 


"하.. 나 진짜.."

 


피곤하니까 차라리 잘 됐어.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붕 떠버리긴 했지만,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 조금 쉰다면 그래도 컨디션이 조금은 나아질 테니까. 다음 수업은 졸 새도 없이 빡빡하게 진행될 테니 조금이라도 쉬어둘 필요가 있었다. 평소 자주 갔던 카페에 들어갔다… 자리가 없다. 바로 근처에 있는 카페에도 역시나 자리가 없다. 아니 왜. 이러지 않았잖아. 오늘은 진짜 아니다. 아마 하루 종일 운수가 따라주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통에 미간을 누르며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카페 안으로 발을 옮겼다. 아. 다행이다. 소파가 아늑해 보여. 음료가 맛없더라도 오늘은 쉬는 게 목적이니까. 쉴 수만 있으면 된다. 적당히 초코라떼를 시켜서 자리에…

 



"아? 츳키!"

 


...봐. 오늘 운 안 따라줄 거라고 했지.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소파에 앉아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사람 속을 긁어놓는 저 능글능글한 미소도,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산발인 머리도. 제법 오랜 시간 있었는지, 노트북 주변엔 거의 비어있는 찻잔과 먹다 남은 스콘 조각이 놓여있었다. 주문하기 전에 발견했다면 조용히 나갔을 텐데…

 


"아… 안녕하세요."


멍하게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 뒤늦게 인사했다.

 



"혼자 왔어? 여기 앉아. 나도 혼자 있었거든."



쿠로오 테츠로.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다.

 

 

 

 

 

 

***

 

 

 

 

 

"이야, 오랜만이네 츳키. 요새 바빠서 통 볼 시간이 없었으니까."

"뭐.. 요즘 다들 과제 때문에 바쁠 시기긴 하죠.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쿠로오씨 학교 멀잖아요."

 


태연하게 말을 거는 그가 짜증나고 야속하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나에게 말 거는 것을 주저할 이유도, 불편해할 이유도 없지만 그냥 마음이 그랬다. 평소엔 눈치도 엄청 빠르더니 이런 것만 둔하지. 솔직히 말하면 음료를 테이크아웃으로 바꾸고 빈 강의실을 전전하더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몸 상태가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를 피할 요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남은 소파 자리는 딱 한 곳. 쿠로오 테츠로의 맞은편 자리. 결국 퉁명스럽게 그에게 대꾸하며 자리에 앉았다. 소파의 푹신한 감촉이 온몸을 감싸온다. 졸려…

 


"아니 뭐.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오늘 오전 수업만 있거든. 적당히 과제나 하고 있었지."

"네에…"

"오길 잘했네. 츳키도 만나고."

 


퍽이나.



 

"잘 지냈어? 요즘 츳키도 바쁠 땐가?"

"조금… 팀 과제가 있어서요. 거의 끝나가긴.. 하지만."

"뭐. 보아하니 잘 지낸 것 같진 않네. 엄청 피곤해 보여."

"네 뭐.. 아. 저 음료 좀 받아올게요."

"아냐. 앉아있어. 내가 갈게."

 

 


음료가 나왔다는 점원의 말에 일어나려 하니,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한 그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카운터로 향했다. 여전히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아마 내가 피곤해하는 것을 눈치채고 배려해준 거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 물론 몇 년을 보아하니, 모두에게 친절하다기보단 제 사람을 유독 살뜰히 챙기는 타입 같지만. 다행히 나는 그 '제 사람' 반열에 든 모양이다. 기회만 나면 저렇게 챙겨준다니까. 그건 참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그의 '제 사람'이 내가 아는 것만 꽤 여럿인 게 조금 불만이라 그렇지.

 


"여기 있어. 날도 추운데 웬 아이스?"

"아. 아이스로 시켰었나."

"잘못 시킨 거야? 바꿔다 줘?"

"됐어요. 뜨거운 거 먹기도 불편하고. 여긴 따뜻하니까."

"뭐. 그건 그렇네. 자. 여기 쿠키도 꽤 괜찮으니까 같이 먹어. 요즘 밥 잘 못챙겨 먹지?"

"… 뭐…. 음. 네."

"얼굴 보니까 그렇네. 눈 새빨간 거 알아? 집 가서 쉬어야 되는 거 아니고?"

"뒤에 수업 있어서 안돼요."

"성실하네- 나 같으면 자체휴강이야."

"그건 쿠로오씨 얘기고."

 


퉁명스럽게 뱉고 잘못 주문한 아이스초코를 마셨다. 달콤하고 시원한 액체가 입안을 잠시 머물다 목을 타고 들어간다. 이게 오늘 첫 끼던가. 분명 배가 고파야 할 터인데 달고 텁텁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그 이상 뭔가를 집어넣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가 가져다준 쿠키를 괜히 만지작거려본다. 일부러 사다 주었지만, 먹지 않아도 재촉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볼 일이 뭐길래 여기까지.. 아카아시씨 만나러 왔어요?"

"에. 어떻게 알았어?"

"뻔하죠. 두 분 친하시잖아요. 많이."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니야. 틀렸다고 해줘요..

부탁받은 물건도 전해줄 겸, 의논할 일이 있어 왔다고 했다. 그러시겠죠. 아주 흔한 변명이다.

 

 


"쉬려고 온 거지? 좀 자 둬. 나 어차피 과제하려고 온 거니까."

"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나 때문에 못 자면 내가 더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래. 몇 시에 일어나야 해? 못 일어나면 깨워줄게."

"한 시간쯤 뒤엔 가긴 해야 하는데.."

"깨워줄게. 엎드려서 좀 자."

"그래도 어떻게 사람을 앞에 두고…"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신경 써. 자. 자."

 


 

우리 사이에는 무슨. 무슨 사인데.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주변의 쿠션을 하나둘 끌어모은 그가 나의 몸 주변에 벽을 둘러치듯 쿠션을 받쳐주었다. 자 둬. 어차피 나 과제해야 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졸린 아이를 달래 재우듯, 속삭이며 나의 머리를 지긋이 눌러 쿠션에 기대주었다. 애 취급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졸린 몸은 푹신한 쿠션에 빠져들어 눈꺼풀과 입에 점점 무게를 실어 왔다. 졸리다. 따뜻하다. 사실은 그의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잠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가려주려는 듯, 노트북의 위치를 옮기고 자세를 고친 그가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솔직히 멋있다. 하나하나 세심한 그의 배려가 좋았다. 그 배려를 티 내지 않으려는 다정함도. 반도 마시지 않은 채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유리 잔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손가락이 쓸어내리는 모양을 따라 물길이 만들어진다. 차갑다. 기분 좋아.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카페가 아니라, 그의 맞은편에 놓인 이 쿠션이 아니라, 그의 품이었으면 좋겠다. 지친 몸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짧은 휴식을 취했다.

 

 

 


 

꿈을 꾸었다.

쿠로오 테츠로. 그가 나오는 꿈.

나는 그와 함께 배구를 했고, 함께 웃었고,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좋아한다고.

 



--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츳키

 



꿈속의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츠키시마

 



꿈속에서, 나는 츠키시마 케이가 아니었다.

 

 


 

"츳키. 그만 일어나. 수업 가야 한다며."

"...아."

 


 

 

몸을 흔들어대는 감각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코앞에, 그것도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다. 펄쩍 놀라 그를 밀어내고 안경을 고쳐 썼다. 아 뭐야 진짜. 누가 사람을 이렇게 깨워.

 


"아, 아니 무슨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깨워요 사람을."

"몇 번 불렀는데 안 일어나길래. 자는 얼굴 구경할 수도 있는 거지 뭐. 꿈꿨어?"

"몰라요. 그… 제가 무슨 이상한 소리 냈어요?"

"엉? 아니. 조용히 잘 자던데. 눈이 막 이렇게 이렇게 빠르게 움직였거든. 아기들 자는 것처럼."

 


제 눈앞에 검지를 치켜들고 빠르게 왔다 갔다 하며 웃는다. 괜히 이상한 꿈을 꿔서, 게다가 저렇게 놀리니까. 얼굴이 홧홧 달아오른다. 붉어진 얼굴을 들킬 새라 급히 가방이라도 챙기는 척 해 볼 요량으로 가방을 살폈다. 아. 맞다. 어차피 꺼낸 짐 없었지. 핸드폰 화면을 켜본다. 수업시간까진 아직 여유롭다. 천천히 걸어가도 수업 전에 자리를 골라 앉아 주변을 정리해도 충분히 시간이 남을 것이다. 일부러 이렇게 맞춰서 깨웠나. 그를 흘끔 바라보니 그 역시 노트북을 닫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어차피 아카아시 만나러 가야 하니까. 같이 가자. 시간 아직 많이 남았지?"

"네에.."

"그럼 가자. 이것만 정리하면 되니까."

"아, 먹은 건 제가 치울게요. 천천히 하세요."

 


쟁반에 그와 내가 먹고 마신 것들을 담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마셨다기엔 그가 사준 쿠키는 손도 대지 않았고, 아이스초코는 이미 얼음이 죄다 녹아 맹탕이 되었지만. 쿠키를 주머니에 넣고 아이스초코를 쭉 빨아 한 모금 들이켜보았다. 역시. 맛없다. 초코보다 물맛이 더 느껴지는 이도 저도 아닌 맛. 쟁반과 함께 카운터에 올려 반납해버렸다.

 

 





 

아카아시씨와는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기에 그와 함께 걷게 되었다. 아카아시씨는 나와 같은 학교. 쿠로오씨의 학교는 여기서 두어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다. 학교가 서로 가까운 그 둘, 그리고 여기선 지하철로 30분은 더 가야 하는 곳에 다니는 보쿠토씨까지. 그들은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자주 만나며 친목을 다지는 듯했고, 내가 도쿄로 올라온 이후엔 종종 그들의 모임에 나까지 끼게 되었다. 그럭저럭 학교도 가깝고 친해서인지 나와 아카아시씨가 다니는 학교에서 쿠로오씨를 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1교시가 언제 시작하는지, 수업 시간이 몇 분이나 되는지는 쿠로오씨도 이미 빠삭하게 꿰고 있다. 오늘도 굳이 아카아시씨를 만나러 여기까지 행차하신 거다.

 


 

참 지극정성이다.

바보 같은 질투심이 고개를 드는 감각에, 주머니 속 쿠키만 괜히 어루만져 본다.

언젠가 넷이 함께 술을 마시던 날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꽤 오래 좋아했다고. 사뭇 진지한 그의 표정에 다시금 반하면서도, 어쩐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옆에서 보쿠토씨와 또 한차례 작은 실랑이를 하고 있는 사람. 아카아시 케이지.

아마도 쿠로오 테츠로가 좋아하는 사람.

 

 


 

"...어디까지 따라올 거예요?"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학교까지 함께 걸어왔다. 정문쯤에서 헤어지겠거니 했는데, 그는 태연하게 계속 나를 쫓아오더니 급기야 강의실까지 따라와 내 옆자리에 턱하니 앉는다. 뭐 하는 거야. 약속 있다며.

 


 

"아카아시도 지금 수업시간일걸. 이거 끝날 즘에 만나기로 했거든. 옆에서 대충 시간 때우다가 가면 맞을 거야."

"도강이에요 이거."

"알아요.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뭐. 열심히 수업 듣는 척할 테니까."

"아카아시씨 수업 들어가면 되잖아요."

"싫어요. 뭣보다 나 걔 수업 뭔지 모른다고. 아까 츳키 시간 때우는거 도와줬으니까 이번엔 츳키가 도와줘."

"그럼 카페에 더 있던가.."

"과제 다 끝났고, 슬슬 엉덩이 아파서 일어나고 싶었거든. 그리고 이미 나와버렸는걸."

"진짜.. 뻔뻔해가지고.."

"감사합니다~"

 

 


하여간 진짜 뻔뻔한 건 타고났다. 있는 힘껏 흘겨보았지만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뭐야. 좋아하는 사람 약속까지 시간 때우기 용으로 쓰겠다 이건가.

 


 

쿠로오 테츠로는 아카아시 케이지를 좋아한다. 사실은 근거도 뭣도 없다.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그를 좋아한다는 자각이 생긴 이후, 눈으로 계속 그를 쫓으면서 깨달은 게 있다. 그를 바라보면 언제나 같은 시야엔 아카아시씨도 함께 있다는 것. 그냥 친해서. 친해서 그런 거겠지. 나보다 그와 1년이나 더 먼저 알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함께 있는 둘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고, 함께 있는 시간은 길었으며, 무엇보다 진지한 이야기 도중 환하게 웃는 그의 표정엔 사랑이 가득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의 표정. 아. 좋아하고 있구나. 저 사람을. 그렇구나. 처음 느껴본 이 간질간질한 감각이 나의 일방적인 감정인 것을 알았을 때, 간지러운 설렘은 이내 싸르르한 상처로 바뀌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럼 마음을 접었으면 될 일인데. 바보처럼 좋아하는 감정은 커지고 커져서 지금껏 가슴속에 머물러 있다. 이러기를 벌써 4년째. 어느새 나는 그들과 술잔을 부딪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좋아한다. 바보 같지. 참 바보 같은데.

 



수업시간 내내 그는 노트에 이것저것 끄적인다거나, 턱을 괴고 수업을 듣는다던가 하며 정말 '열심히 수업 듣는 척'을 훌륭히 수행해내고 있었다. 내가 전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카페에서 한숨 자고 온 것이 도움이 됐던 건지, 다행히 몸은 버틸만했다. 문제는 잠이 모자란 몸뚱이가 아니라 내 옆에서 수업을 듣는 척 이쪽을 자꾸만 흘끔흘끔 바라보는 저 사람이다. 집중이 될 리가 없지. 왜 자꾸 쳐다봐. 물론 본인이 듣는 전공도 아니니 심심하기야 하겠지만, 이러면 내가 집중할 수가 없다. 아 안돼. 시험 범위라고. 다시금 쿡쿡 쑤셔오는 머리에 미간을 누르며 눈을 꾹 감았다. 몸이 괜찮은 건 착각이었나? 졸리진 않은데 두통이 몰려온다. 역시 잠깐 동안의 낮잠으로는 역부족인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쑤셔오는 머리를 진정시키려는데, 옆구리를 쓸어내리는 느낌에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졸려?"

"아.. 아뇨. 옆구리 건드리지 말아요 진짜."

"네네- 죄송- 그래도 집중해야지 츳키. 아니면 좀 자게 가려줘?"

"아뇨. 됐어요. 들을 거예요."

"그래 그래.'

 



그는 잠시 내 옆구리에 머물던 손을 들어 나의 목덜미를 잡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주물러주었다.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실 꽤 기분이 좋아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목뒤의 뭉친 근육을 누르는 그의 손이 따뜻하다. 나도 모르게 살짝 그 손에 몸을 기대게 된다. 힘도 풀리고. 졸리네. 살짝 나른해지는 기분에 괜히 펜을 손가락에 끼워 몇 바퀴 돌려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시 느껴지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쿠로오씨, 엄청 눈에 띄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도강은 의심한 번 받지 않도록 완벽했고, 별다른 일 없이 수업도 마무리되었다. 대형 강의라 다행이었지. 짐을 챙기기 위해 일어나니 조금 현기증이 일어 잠시 책상을 짚었다.

 


"괜찮아?"

"아. 네. 조금 현기증 나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요. 나가죠."

"전혀 괜찮은 게 아닌데.. 잠 제대로 못 자고 있지?"

"뭐… 네. 그렇네요."

"얼마나?"

"일주일.. 됐나."

"일주일? 심한데. 그렇게 바빠? 몸 망가지면 다 소용없는 거야 그거."

"아뇨. 과제는 할만한데. 잠이 안 와요 그냥. 밤에 잠을 못 자요."

"자취 중이니까.. 당연히 밥은 제대로 안 먹을 거고."

"당연히는 뭐예요..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정신에 츳키가 제대로 챙겨 먹을 리가 없지. 너 그러다 진짜 몸 망가져."

"신경 쓰지 마요. 아. 아카아시씨 있네. 전 그럼 가볼게요."

"안 바쁘면 같이 가지? 밥 먹으러 갈 건데."

"바빠요."

 

 


저만치서 우릴 발견하고 걸어온 아카아시씨에게 꾸벅 인사했다. "왜 거기서 나오십니까?" "도강-" 그들의 대화를 피하듯,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아카아시씨가 나를 부르려고 했던 것 같지만 이미 한참을 걸어 나온 뒤다. 좀 버릇없었나. 사실은 바쁜 일 하나도 없는데. 그치만 둘이 다정한 거, 보기 싫어.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여전히 식욕이 없다. 몸 망가진다며 걱정했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 간단하게 상을 차리고 먹어보았지만, 목으로 음식이 넘어가는 감각이 영 껄끄러워 금방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반 그릇도 되지 않는 적은 양의 밥을 간신히 넘기고, 대충 빈 그릇을 싱크대에 던져 넣었다. 뭘 하고 있을까. 그 사람들은. 지금쯤.

 

 


대강 벗어둔 옷을 정리하다, 코트 주머니에 여전히 쿠키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다가 어디에 부딪치기라도 한 건지, 볼품없이 바스라져있다.

버릴까? 하지만 일부러 사준 거니까.

아직 크게 남아있는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습기 없이 퍽퍽한 쿠키가 입안으로 들어가니 목이 매인다.

입안에 남은 달콤함이 오히려 불쾌하다. 떨어진 가루를 털어냈다.

 


목말라. 냉장고를 열어 얼마 남지 않은 물을 꺼내 마셨다. 낮에 마셨던 아이스초코가 생각난다. 얼음이 전부 녹아 맹맹했던, 물도 아이스초코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맛. 그와 나의 관계도 이런 느낌일까. 그의 '제 사람'이라는 굴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이상은 아닌. 그런 관계.

 


잠이 모자라서인가. 쓸데없이 감상적이 되어간다.

물을 벌컥벌컥 목구멍에 쏟아내고, 빈 병을 신경질적으로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

 

 




잠이 오지 않아 더없이 외로운 밤이다.

그 사람한테 잘 해주지 마요.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진부한 대사가 머리를 스쳐간다.

아카아시도, 쿠로오도. 츠키시마에겐 더없이 소중한 선배들이다.

그 둘이 서로 좋아한다면 후배인 츠키시마에게도 물론 기쁜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 뭘 바보처럼 질투하고 있어.

답답해. 쪽팔려. 힘들어. 졸려. 힘들어.

 



"춥다"

 



푸근한 이불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데도 추워. 입 밖으로 꺼내면 곧 따뜻해지기라도 하는 마냥 부러 소리 내어 말해본다. 그 누구도 듣지 않을 간절한 목소리는 목소리를 낸 주인의 귀로 다시 흘러들어간다. 아주 공허하게.

츠키시마 본인도 알고 있다. 그가 매일 밤 잠들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은, 산더미 같은 과제도,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도 아닌.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것을. 홀로 도쿄에 올라와 산지 나름대로 시간이 흘렀다. 늘 가족과 부대껴가며 살았으니 슬슬 외로움을 느낄 때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지기는커녕 입 밖으로 표현조차 하지 못한 짝사랑은 가슴을 후벼파는 송곳이 되어 자꾸만 저를 찔러왔다. 밤이면 더했다. 몸이 잠을 원해도, 자꾸만 그 송곳이 마음을 찔러온다. 그가 잠에 들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래서 뭐?

알면 뭐가 달라져?

 



스스로를 꼭 끌어안았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그에게 필요한 것은 수면제가 아니라, 따뜻한 우유나 라벤더티가 아니라, 위로다. 하지만 얻을 수 없겠지. 그가 해주길 원하는 거니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전해져오는 따스한 온기. 다정한 위로.

 


지금 당신의 온기는 누굴 향해 있나요.

결코 물을 수 없는 질문을 입속으로만 되뇐다. 입안이 쓰다.

 


조금 더 몸을 작게 웅크렸다. 감은 눈꺼풀 위로 옅은 빛이 새어들어온다.

새벽 다섯시. 조금씩 들려오는 아침이 오는 소리에, 츠키시마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그러니까 지금 뭐 하시냐고요."

"살뜰하게 후배를 챙기는 멋진 선배 노릇을 하고 있지."

"필요 없으니까요. 나가요."

"와- 박하다- 그러지 말고. 봐. 역시. 냉장고에 뭐 하나도 없잖아."

"냉장고 뒤지지 말고 나가요."

"뒤지는 게 아니라 채우는 거고요."

"그것도 필요 없으니까. 나가라고 했어요."

 



하여간 죽어도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다. 아. 젠장. 아카아시씨는 어떻게 보쿠토씨를 구워 삶는거지. 이 사람이 원래 더 난이도가 높나.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지. 내가 하는 말이 들리지가 않나. 남의 집에 와서 뭐 하는거야. 남의 집 부엌 건드리는 거 민폐란 걸 모르나. 아 진짜 왜 이러지.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이렇다. 일과를 마치고 대충 의자에 구겨앉아 지친 몸을 쉬고 있는데, 이 한밤중에 초인종이 울려댔다. 문을 열고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안으로 밀고 들어온 사람은 쿠로오씨.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뭔가 잔뜩 든 봉지를 펼쳐 온 부엌을 헤집어 놓고 있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 정확히 말하면 헤집어놓는다기보단 그의 말대로 채워 넣는 거지만.

 


 

"이게 무슨 민폐에요 진짜."

"챙겨주는 건데 민폐라니. 쿠로오씨는 슬프네요."

"게다가 이렇게 막 밀고 들어오는 거 범죄네요."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확인도 안 하고 문 막 열어주래?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나니까 망정이지."

"꽤 여러 번 말한 것 같긴 한데, 진짜 뻔뻔하네요."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거 좀 채워뒀어. 여기 반찬가게 맛 괜찮더라. 이쪽 칸에 반찬 담아뒀고, 과일은 이쪽이야. 과일 금방 무르니까 바로바로 먹어. 먹기 안 귀찮은 걸로 골라놨으니까. 그리고…"

"으악.. 이거 다 못 먹어요."

"주기적으로 와서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체크할거야. 뭐 온 김에 같이 먹어주면 상하기 전에 비우겠지."

 



물 말고는 거의 비어있던 냉장고가, 그가 한바탕 들쑤시고 났더니 금방 가득 찼다. 얼마나 자주 오려고 저런 말을 하나… 밥은 먹었냐는 질문에 대충 얼버무렸더니, 그 안에서 몇 가지를 꺼내 금방 상을 차려냈다. 엄마도 아니고 뭐야. 이것도 '제 사람 챙기기'의 일종인가. 좀 심한데. 그래도 더 이상 말리기도 귀찮으니 일단 받기로 했다. 뭐.. 솔직히 기분 꽤 괜찮기도 하고. 쫑알쫑알 잔소리하는 모양새가 좀 시끄럽긴 하지만,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좀 뿌듯하기도 하다.

 



아카아시씨는, 뭐든 스스로 척척해내니까. 이런 일은 별로 없겠지.

…바보 같은 승리감에 젖을뻔했다. 얼른 아무 반찬이나 집어 입에 쑤셔 넣었다. 오. 맛있네 이거.

 


 

다짜고짜 집에 찾아와 남의 집 냉장고를 채우고, 밥까지 차리더니 급기야 TV까지 틀어 시청하기 시작한 그를 말릴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겠지. 항의의 뜻을 담아 열심히 째려보았지만, 그는 어느새 본인이 사온 귤을 까서 권하기까지 하는 뻔뻔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래. 뻔뻔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의 옆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아 그가 내민 귤을 받아먹었다. 상큼한 과육이 터져 입안을 적셨다.

 

 


"집에 갈 생각 전-혀 없으신가 봐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저 추운 밖에 쿠로오씨를 혼자 내보낼 셈이야? 우와- 비인간적이네."

"쿠로오씨 뻔뻔함도 비인간적인 수준이고요."

"그러지 말고. 따뜻한데 앉아버렸더니 일어나기가 귀찮단 말이야. 냉장고에 채운 저거 방세라고 쳐줘."

"그러시던가. 아, 보시다시피 침대 작은 거 하나밖에 없으니까 알아서 주무세요. 전 몰라요."

"네-"

 

 


TV 채널을 돌려보았지만, 딱히 재미있는 것은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와 나의 대화가 방 안을 채운다. 평소라면 관심 있게 보지도 않았을, 요리를 주제로 한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 지적하고. TV 보는데 시끄럽다며 받아치다가 별것 아닌 것을 주제로 작은 토론을 펼치고. 그러다 다시 채널을 돌리고. 생산적이지도 않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TV를 봐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 작은 자취방에서 등을 기대려면 벽을 등지고 앉아야 하니까, 그런 자잘한 핑계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옆에 두고 앉아 한참을 떠들었다. 그리고. 조금 졸리니까. 며칠 동안 통 잠을 못 잤으니까.

그의 품이, 따뜻하니까.

 





살짝, 몸을 기댔다.

그는 피하거나 내 몸을 치우지 않았다.

그가 어깨를 살며시 감싸주었다. 따뜻해.

 


 

졸음이.

 




몰려온다.

 


 

자고 싶지 않은데. 그의 옆에선.

 

 

 


"졸려 츳키? 침대에 누워서 자야지."

"음.. 누우면 또 잠 깰걸요. 졸다가도 자려고 하면 그렇던데."

 



사실은 이렇게 있고 싶어.

 


 

"그래도. 누워. 제대로 자자."

"쿠로오씨는?"

"애초에 나 너 재우고 챙겨주려고 온 거야. 걱정돼서. 난 여기 치우고 택시라도 타고 가던가 할 테니까."

"으음.. 귀찮아."

"자자- 들어가세요."

 

 


 

한참 그렇게 그의 어깨에 고개를 부비며 실랑이하다, 결국 항복 선언을 하고 이를 닦으러 화장실로 들어왔다. 이를 닦고, 잘 준비를 하는 동안 역시. 서서히 잠이 깨기 시작했다. 아- 이럴 줄 알았다고. 그러나 다시 그의 곁에 가서 앉았다간 한바탕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얌전히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어느새 상을 정리한 쿠로오씨가 내가 눕는 것을 보고 불을 꺼주었다. 자취방이 순식간에 어둠과 고요에 잠겼다.

 



이대로, 나는 잠들지도 못하고 그는 가버리면 어떡해?

 

 



"쿠로오씨."

"응."

"잠 안 와요."

"눈을 감아야지요-"

"그래도 안 와요."

"애가 다 됐네. 잠들 때까지는 안 가고 옆에 있어줄게. 자."

"더 못 잘 텐데 그러면."

"그럼 가?"

"…. 그건 아니구요."

"살짝 옆으로 가봐."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하다, 그의 말에 몸을 옆으로 옮겼더니 곧 묵직한 무게감이 침대의 스프링을 울렸다. 놀라 눈을 뜨니, 이내 다시 그의 손길로 시야가 가려졌다. "눈을 감아야 잠들지."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들린다.

이불 속이 두 사람의 온기로 따뜻하다. 뜨거워. 두근거려. 어떡하지.

 

 


"...간다면서요."

"잠들면 간다고 했잖아. 잠들 때까진 같이 떠들어줄게. 눕는 건 좀 봐주라. 불편해."

"으음…"

 



괜한 불편함에, 심장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몸을 자꾸만 뒤척였다. 이거 잠이 오겠어? 내가 못 자는 게 애초에 누구 때문인데. 한참을 뒤척이다가.

 


나를 안아오는 그의 팔에 움직임을 멈췄다. 나도 모르게 숨도 함께 멈춘 것 같아 얼른 다시 숨을 내쉬었다.

 


"뭐예요."

"애들 재울 땐 이렇게 하더라. 안아서 등 두드려주고."

"다 큰 성인 남자한테…"

"아냐. 있어봐. 효과가 있다니까."

 


 

 

바보 같다. 바보 같은데. 솔직히. 좋으니까. 눈을 감고 조금 더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체향이 코끝에서부터 온몸을 감싼다. 따뜻해. 좋다. 그가 어색하게 놓인 나의 팔을 들어 자신의 허리춤에 놓아준다. 그걸 핑계로 조금 더 붙어 감싸 안았다. 따뜻하다. 그가 조금 더 안아주었다. 따뜻해.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사이에 틈 하나 주지 않을 정도로 붙어 끌어안게 되었다. 좋다. 따뜻하다. 햇볕에 잘 말린 푹신한 이불에 온몸을 감싼 듯 기분이 좋다.

 




그리고 조금씩, 잠이 오기 시작한다. 거짓말처럼.

싫어. 오늘은 자고 싶지 않아.

 


 

"츳키, 자?"

"...아직.."

"불편하진 않아?"

"응.. 좋아."

"졸린가 보네."

"안 졸려.."

 


 

나긋나긋한 그의 목소리가 마치 꿈에서 들려오듯, 멀기만 하다. 분명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을 텐데.

 

 


아. 나도 모르게 잠이 든 걸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필사적으로 다시 밀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눈에 힘을 주어도 좀처럼 떠지지 않는 통에 계속 잠과 싸우고, 또 싸웠다. 싫어. 쿠로오씨가 안아주고 있는데. 잠들면 아깝단 말이야. 꼭 금방 잠들기 싫을 때만 졸리지.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잠… 안 온다…"

"이미 목소리는 잠들었는데 츳키."

 


그가 웃는 목소리가 바람 같다. 그의 웃음 섞인 공기가 귓가를 간질인다.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려고 고개를 부볐더니 그가 팔에 힘을 주어 안아주었다.

 


 

"기분...좋다…"

"나도."

 


수마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지, 입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야. 츠키시마 이 바보야. 그만 말해.

 



"쿠로오씨도.. 이왕이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이렇게 있는 게… 좋을 텐데…"

"누구?"

"아카아시찌.. 조아하자나…"

"나 걔랑 만나면 너 얘기밖에 안 해."

"거짓마알…"

 

 


 

아. 수마와의 싸움에서 졌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

 


 

꿈에서 나는 여전히 쿠로오씨의 품에 안겨있다. 여전히 따뜻하고,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달콤했으며, 여전히 나는 잠을 이겨내려고 그의 품에 코를 부비고 있었다.

쿠로오씨는 갔을까?

 

 


"갔어..? 쿠로오씨…"

"아직 이렇게 옆에 있어. 츠키시마."

"응… 좋다..."

"기분 좋아?"

"아니. 쿠로오씨가."

 

 


꿈이니까. 조금 거침없이 얘기를 해보았다.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완전히 잠들어 꿈을 꾸고 있나 보다.

졸려서 헛소리하면 안 되는데.

그가 아직 옆에 있으면 어떡하지.

아니, 가버렸으면 어떡하나.

 

 

 


내 말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는지, 아니면 혼자 속으로만 생각한 건지 이젠 졸려서 구분도 되지 않는다.

난 계속 이렇게 있고 싶어요. 당신이랑.

 

 


 

꿈결에 다시 속삭여본다.

그러자

"그래. 그러자."

하고 속삭여오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이마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기분 좋은 느낌에 나도 고개를 들어 입술을 부벼보았다.

 


코끝에 닿아오는 숨소리를 끝으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잘 자요. 쿠로오씨.

 

 

 

 


출처: http://jingjinglim.tistory.com/19 [임징징이 의식 저장소]

2016년 12월 21일 티스토리 업로드글_포스타입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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